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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18대 대선에 대한 국제볼셰비키그룹(IBT)의 입장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립에 투표를!

 

<차례>

자본주의의 위기와 혁명 지도부의 위기

1. 인민전선 :

17대 대선 이후 남한 좌익들의 인민전선 행각: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다함께

인민전선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는 이유

 

2. 노동자주의:

2008년 촛불시위와 노동자주의

노동자주의 당건설관

노동자당 건설을 위한 사노위 실험

‘변혁모임’과 대통령후보 전술

 

결론: 18대 대선에 대한 IBT의 입장

18대 대선의 출마자들

김소연 후보에 대한 우리의 입장

궁극적 과제: 혁명 지도부의 수립

 

 

자본주의의 위기와 혁명 지도부의 위기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위기는 소련 블록 붕괴 이후 지난 20년간의 자본 절대 우위의 역관계에 제동을 걸었다. ‘자본주의의 영구적 승리’라는 터무니없는 수사는 자취를 감추었다. 경제위기가 단기간의 위기가 아니고, 자본주의 고유의 해결할 수 없는 위기라는 인식이 자본주의의 이론적 옹호자들의 입에서마저 나오고 있다.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었고 현재 산업은행그룹 회장으로 있는 강만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재 위기는 대공황 때보다 더 크고 오래 갈 것이다.…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 이후 각국 정부가 한 일이라고는 민간부채를 정부부채로 바꾸어놓은 것뿐이다.…지금은 구조적인 문제에 처해 있다. 어떤 이는 ‘자본주의는 끝났다.’라고 한다.”—경향신문, 2012년 6월 15일

경제위기 이후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의 역관계는 다시 요동치고 있다. 지배체제의 안정성이 흔들리자 이에 의존하는 지배계급의 자신감은 크게 위축되고 있다. 반면 지배체제의 위기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노동계급과 피억압인민의 저항은 활성화되고 있다. 미국, 튀니지, 이집트,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으로 사회소요가 번져가고 있다. 체제 모순으로 인한 계급적 갈등은 세계정세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고열에 못 이겨 세계 이곳저곳은 뜨거운 공기를 내뿜으며 울룩불룩 솟고 터지고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다.

남한은 OECD 35개 국가에서 자살률 1위, 연간 노동시간 1위,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 1위, 출산율 최저를 기록하는 착취율이 가장 높은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생존의 벼랑끝까지 몰린 노동인민은 연일 생존권 방어투쟁에 나서고 있다.

2008년 촛불 시위 이후 산발적인 생존권 투쟁 이외에 이렇다 할 대규모 군중시위가 없었지만, 세계경제위기의 심화, 계급적 대립의 격화, 자본가계급의 동요, 노동계급의 각성과 자신감 회복 등은 발화점이 낮은 남한에 조만간 격동을 불러올 것이다. 문제는 “인류의 역사적 위기는 혁명 지도력의 위기로 환원된다(이행강령).”는 트로츠키의 말처럼 지도력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 있다.

2012년 12월 19일은 남한의 18대 대통령 선거일이다. 지난 2007년 대선 이후 2012년 대선에 이르기까지 노동계급의 주체적 상황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이렇다: ‘기존 사이비 노동지도부는 파산했으나, 혁명적 지도부는 구축되지 않았다.’ 민주노동당은 부르주아 정당인 국민참여당과 합당, ‘야권연대’로 노동계급의 정당이기를 포기하면서 파산했다. 진보신당과 진보정의당도 다를 바가 없거나 더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한편, 기존의 부르주아 노동자당에 포섭되지 않은 소위 ‘사회주의’ 진영 대부분은 노동자주의(조합주의 또는 경제주의)에 빠져있다. 혁명 강령의 수립과 전위의 구축 없이 대중에게 직접 달려가 지지를 얻겠다는 덧없는 지름길을 모색하고 있다. 물론 그런 과정을 통해서도 ‘노동자당’은 건설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당은 민주노동당의 재판일 뿐, 결코 ‘혁명정당’이 될 수 없다.

‘인민전선’과 ‘노동자주의’ 이 두 가지는 남한의 노동계급 앞에 놓인 핵심적 장애물이다.

 

1. 인민전선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세계 각국에서의 혁명 기회 무산의 많은 부분이 인민전선 정책과 관련이 있다. 특히 1920년대 중반의 중국, 1930년대 스페인, 1960년대 인도네시아, 1970년대 칠레에서 혁명적 상황이 있었다. 그러나 지도부의 타협적 태도로 결성된 인민전선은 ‘전복의 위기를 타개하고 전투적 노동계급을 분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자본가 계급에게 제공하였다.

1917년 10월 혁명은 식민지 • 반식민지 국가의 인민들을 크게 고무시켰으며, 소련과 코민테른은 이들에게 희망의 등대가 되었다. 러시아와 인접해있는 식민지 조선의 인민들에게도 그러했다. 3.1 운동 이후 기존의 민족해방운동에 한계를 느낀 보다 진지한 지식인들이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간주하면서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지도부 코민테른은 유럽혁명의 불발과 러시아 노동자국가ㆍ소련 공산당의 관료화와 맞물려 기회주의 노선으로 퇴보하게 된다. 이러한 퇴보는 곧 재앙적인 중국 정책으로 표현되었다. 코민테른은 이 정책을 식민지 조선에 대해서도 적용하고자 하였다.

“코민테른은 이 ‘1차 조선공산당’에 대해 “조선 공산주의 단체들이 가까운 장래에 벌여야 할 대중 사업 영역에서 조직적․정치적 주요 임무는 노동자 ․ 농민뿐만 아니라 수공업자 ․ 인텔리겐치아 ․ 중소부르주아지 등 모든 계급과 연합하여 민족해방투쟁을 조직하는 데 힘을 쏟는 것에 있다”는 결의를 채택했다. 또 중국국민당 형태와 같은 ‘민족혁명당’(national revolutionary party)을 설립하는 문제에 대하여 말했다. 언제 만들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조선 문제에 대한 코민테른의 또 다른 결의안이 있었음이 바로 앞에서 인용한 오토 쿠시넨의 글에 나타난다. 그 글에서도 기존 민족단체들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어 중국국민당 형태의 유일당(a single party)을 결성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최규진, <코민테른 6차대회와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정치사상 연구>

이러한 방침은 민족유일당운동 • 신간회 결성을 통해 실현되었다. 그러나 인민전선 파트너인 토착 부르주아 세력은 일본 제국주의의 직접적인 영향력 하에 있었으며, 군대와 비밀경찰을 통제할 수 있는 중국국민당에 비해서 너무나 허약했고, 한편으로는 3.1 운동 이후 대량학살과 같은 극단적인 수단을 통해서라도 진압해야하는 급박한 상황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으므로 중국에서 벌어진 재앙이 재현되지는 않았다.

“제3기”의 터널을 거친 이후 인민전선은 더 나쁜 제국주의에 맞서 ‘덜 나쁜’(혹은 ‘민주적’인) 제국주의 세력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발상으로 표현되었다. 조선공산당의 지도자 박헌영에게 미국 • 영국 • 장개석의 중국은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로 인식되었다(<해방전후사의 인식>, 112쪽). 미군이 한반도 38도선 이남에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자 조선공산당은 미군정을 거스를 수 있는 언행이나 파업투쟁을 자제하고자 했다(김남식, <박헌영노선 비판>, 77쪽). 심지어 군정청이 좌익진영의 인사들을 구속하는데도 박헌영은 그것이 미군정의 본심이 아니라 일선 직원들의 실수라고 생각했다. 이런 유화적인 태도는 좌익세력과 노동계급에 대한 제국주의자들의 적의를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군정청은 오히려 자신감을 가지고 좌익세력에 대한 공세를 감행할 수 있었다(같은 책, 78쪽). 공산당은 뒤늦게 저항에 나섰지만 패배를 모면할 수 없었다. 군정 당국과 우익깡패들의 살인적인 백색 테러로 수많은 노동자 농민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살아남은 투사들도 지하로 산 속으로 숨어야 했다. 그나마 살아남은 자들도 전쟁 속에서 거의 전멸하였다. 그 결과 남한의 전투적 노동운동이 다시 서기 위해서는 40여 년의 시간이 지나가야 했다.

1987년 6월 항쟁과 7 • 8 • 9월의 격렬한 파업투쟁을 통해서 남한 노동운동은 긴 잠에서 깨어났음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 해 있었던 대통령선거에서 이제 막 각성한 노동계급을 오도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NL그룹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세력은 자유주의 부르주아인 김대중 지지노선을 들고 나왔으며 IS(지금의 ‘다함께’)는 이 노선이 올바른 것이었다고 강변한다.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된 이후로도 남한 좌익들의 인민전선에 대한 열망은 식을 줄 몰랐다.

 

17대 대선 이후 남한 좌익들의 인민전선 행각

진보신당

2007년 대선 이후, 민주노동당에서 소위 평등파가 다수파의 종북주의와 패권주의 등을 문제 삼으며 분당하면서 진보신당을 창당하였다. 우리는 <남한 17대 대선에 대한 국제볼셰비키그룹(IBT)의 입장>에서 “노동계급 배신행위가 명백히 드러난 민주노동당 내”에서 “분리 움직임”이 장차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여기에 대해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진보신당의 결성은 근본적으로 반북반공주의 여론에 편승 한 우선회였기 때문에 이 분립을 지지할 수 없었다.

진보신당의 지도부는 계급적 원칙에 입각하여 민노당에서 분립하지 않았으므로, 민노당 다수파의 인민전선 경향을 함께 공유하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가능한 일이다. 진보신당이 창당되기 이전에 이미 신당파의 주요 인물 가운데 하나인 노회찬은 임종인ㆍ고진화 같은 부르주아 정치인들을 “진보정치를 함께할 훌륭한 분들”이라고 추켜세우며 이들과 함께 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노회찬, “임종인-고진화 의원과 진보신당 논의”, 참세상, 2008년 2월 11일). 이것이 정말로 실현되었다면 2008년도판 통합진보당이 되었을 것이다.

이로부터 2년 반이 지난 2010년 6월 2일, 진보신당의 경기도지사 후보였던 심상정은 노무현 정권 시절 신자유주의 정책을 주도한 유시민과의 “반MB연대”를 위하여 후보에서 사퇴하였다. 여러 좌익조직들의 “단일후보”로 추대된 같은 당의 충남도지사 후보 이용길도 MB정권을 심판하기 위하여 후보에서 사퇴하였다. 이러한 행동에 대해 당원들 일부는 격렬하게 항의했으나 “당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한 노력이 인정”된 심상정에 대한 징계는 경고처분으로 끝났다(‘심상정, 이용길’ 징계 두고 당원 반발, 참세상, 2010년 8월 24일).

2010년 하반기에 민주노조를 사수하기 위한 KEC 노동자들의 투쟁과 불법파견에 반대하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가열한 투쟁이 있었다. 지배계급은 이러한 투쟁을 잠재우기 위해서 경찰과 용역깡패의 폭력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충직한 노동 진영 하수인을 이용하기도 한다.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의원이 포함된 야5당 중재단은 파업의 중재자를 자처하며 노동자들에게 농성을 해제하고 투쟁을 중단할 것을 종용하였다. KEC 노동자들의 점거농성이 끝난 이후 진보신당 국회의원 조승수는 “점거농성을 해제하고 본 교섭을 진행하게 됐다는 일차적인 의의가 있고 문제의 마무리를 위한 새로운 국면전환이 만들어졌다는 데도 의미가 있다”(YTN과의 인터뷰)고 말하며 자신들의 활약상을 은근히 뽐냈다.

그러나 이후 사측이 조합원들에게 자행한 인권유린행위와 일방적인 정리해고 통보는 야5당 중재단의 중재가 적어도 노동자들에게는 거의 쓸모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정리해고가 철회되기는 했지만 이것은 사측이 어용노조와 체결한 단체협약을 노동자들에게 강제로 적용하기 위해 깔아놓은 포석이었다(정리해고 철회 KEC, 정말 아름다운 일인가?, 참세상, 2012년 6월 8일). 부르주아 정당의 의원들과 협력하면서, 자본주의 하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공정한 중재자 역할을 하겠다고 허세를 부린 진보신당과 민노당의 의원들은 이러한 사태에 일정한 책임이 있다.

2011년, 대중적 부르주아 정치인으로 출세하기를 열망하는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와 이들의 추종자들에게, 3%의 지지도 얻지 못하는 진보신당은 이제 짐이 되었다. 노심조는 이전에 자신들이 종북주의 딱지를 붙이며 내팽개친 ‘동지들’과의 재결합을 위해 당을 떠났다. 물론 의회주의의 화신인 노심조가 떠났다고 해서 이 당에 좌익적인 요소가 강화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노심조가 탈당한 직후 10.26 재보선을 앞두고 진보신당은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한 자유 부르주아 후보 박원순을 단순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선대위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박원순은 민주통합당에 입당하면서 자신이 어느 계급의 대리자인지를 재확인시켜주었다.

금년 3월 좌파의 단결을 주창하며 사회당과 통합한 진보신당은 4.11 총선을 앞두고 다시 한 번 “야권연대”라는 이름의 인민전선을 추구하면서 자신들의 본색을 드러냈다. 야권연대에 대한 진보신당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야권연대의 파트너가 될 수 없었다. 3월 9일 통합진보당의 대표 이정희는 [손석희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진보신당이 야권단일화에 통합진보당이 들어가 있는 한 야권단일화에 응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피력했다”고 밝히면서 진보신당을 야권연대의 파트너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였다. 여기에 대해 진보신당은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하면서 야권연대에 대한 의지가 충만함을 밝힘과 동시에 지배계급의 폭력기구에 호소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들의 몰계급적 국가관을 드러냈다(진보신당, 이정희 대표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 2012년 3월 9일). 또한 일부 지역구에서 진보신당은 야권연대를 성사시키기도 했다(2012년 3월 19일).

부르주아 정당들에게 실연의 아픔을 겪은 이 당은 대선을 앞둔 지금 “노동자 대통령” 김소연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고 선거운동본부에 참여하면서 좌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당의 김소연 지지 방침에 불복한 일부가 청소노동자 김순자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면서 당에 내분이 발생하였다. 개량주의적인 “기본소득”을 핵심으로 내세우며, “경제민주화”같은 애매한 구호를 내세우고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지 않는 김순자 후보는 “주요기업의 사회화”와 “주한미군의 철수”를 선거강령으로 내건 김소연에 비해 훨씬 오른쪽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통합진보당

진보신당이 분립하면서 이제 민주노동당에는 북한을 추종하는 스탈린주의자들과 민주노총 내에서 가장 우측에 있는 ‘국민파’로 지칭되는 노동관료들, 토니 클리프를 추종하는 영국사회주의노동자당의 자매단체인 다함께가 남아있었다(다함께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함).

이 당은 집권여당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구실로 부르주아 야당과 손잡으려는 열망을 공공연하게 표출하였다. 그 열망은 2010년 6월 2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반MB 민주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체결된 민주당/국민참여당과의 선거협정으로 실현되었다. 선거적 관점에서만 본다면, 이 선거를 통해 민노당은 제법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계급의 조직적 • 정치적 독립을 철저하게 훼손시키면서 얻어낸 성과였다.

부르주아 세력과의 선거연합으로 어느 정도 재미를 본 스탈린주의자들이 장악한 민노당 지도부는 소위 ‘진보 대통합’을 통해 다른 개량주의 세력들을 통합하고 심지어 부르주아 좌파와도 동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유시민의 국민참여당이 통합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에 앞서 “다양한 정치 세력”과 “함께” 하기 위하여,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사회주의적 가치”의 “계승”을 천명한 강령을 우익적으로 수정하는 작업을 끝마쳤다.

유시민이 어떤 인물인지를 알고 있는, 기억력이 나쁘지 않은 노동자들 상당수가 이 통합에 반대했으며, 심지어 권영길, 김영훈 같은 우파 노동관료조차도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함께도 당내에서 통합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2011년 11월 20일 민노당은 자유부르주아 정당인 국민참여당과 기어이 통합을 선언하게 된다. 여기에 진보신당에서 이탈한 노심조 일당도 가세하였다. 그리고 12월 5일, 이들의 통합으로 통합진보당이 창립되었다.

노동자 세력과 자본가의 좌익분파가 합쳐진 이 계급블록은 전혀 새로운 유형의 정당이 아니었다. 이와 비슷한 유형의 당으로 이미 중국 국민당을 비롯하여 스탈린-부하린 일당의 지도하에 만들어진 수많은 ‘두 계급 당’이 있었다. 최근에는 짐바브웨의 민주변혁운동(MDC), 영국의 리스펙트가 있었다(전자에 대해서는 <짐바브웨 : 클리프주의자의 독이 묻은 ‘승리’>를, 후자에 대해서는 <RESPECT-able Reformism and Cross-class ‘Unity’>를 참조할 것).

소위 ‘참여계’로 지칭되는 통합진보당 내의 부르주아 세력은 비록 인원으로는 소수였지만 창당 초기부터 국기에 대한 경례, 국민의례 및 애국가 제창에 대한 논란을 일으키면서 적극적인 이데올로기 공세를 펼쳤으며 여기에는 항상 부르주아 언론들의 지원사격이 있었다. 총선이 끝난 이후에도 당 내 부르주아 세력은 진보신당 탈당파와 국민파 관료, NL 일부와 연합하여 선거부정을 빌미로 당 내 다수파인 ‘경기 동부’ 그룹에 맹공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참여계가 저지른 부정은 은폐되거나 쉽게 잊혀졌으며, 이들은 통합진보당의 “혁신”을 주창하는 세력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이후 비록 참여계가 이 당을 전적으로 좌지우지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참여계는 자신의 계급적 기반에서 비롯된 위력을 마음껏 뽐낸 셈이었다.

참여계, NL 일부 분파, 진보신당 탈당파 등으로 구성된 소위 ‘혁신계’는 ‘경기동부’로 지칭되는 분파와 갈라서면서 진보정의당을 창당하였다. 현재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의당 모두 “야권단일화”를 외치며 거대 부르주아 야당에 구애하고 있다. 진보정의당의 대선후보 심상정은 민주당의 문재인과 단일화를 위해 사퇴했으며, 아직 사퇴하지 않은 통합진보당의 후보 이정희도 “박근혜의 당선을 막기 위해 나왔다”고 밝히면서 문재인의 조력자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다함께

과거 “국제사회주의자”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남한의 클리프주의 정치조직 다함께는 민주노동당에 입당하는 한편, 민주노동당을 지속적으로 지지했다. 이 자체로 다함께를 기회주의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사회주의자는 때로는 개량주의 노동자 정당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표명하거나 입당전술을 구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다함께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가 정말로 “비판적 지지”였는지 아니면 무비판적이었는지, 민노당의 혁명적 분립을 촉진시키기 위한 일시적인 입당전술을 구사했는지 아니면 민노당과 화학적으로 결합하기 위한 장기 입당전술이었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으나 여기서 그 문제를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민노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만을 고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87년 대선에서 “대중의 감정”을 고려하여 김대중을 지지했어야 옳았다는 입장을 제출한 바 있었으며, 이러한 입장은 2010년 6월 2일에 있었던 지방선거를 앞두고 “개혁적으로 보이는 민주당/참여당 후보에게 투표해서라도 한나라당을 심판하고 싶어하는 노동자들과도 미래를 위해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반복되었다.

이듬해 10.26 재보선을 앞두고 <레프트21> 67호는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무소속이었으나 사실상 민주당 후보나 다름없었던, “중도 우파”를 자임하는 박원순에게 “이제라도 지지자들의 기대에 부응해 더 선명하고 과감하게 이명박 정권과 나경원 후보를 비판하고, 급진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친절한 충고를 곁들이면서 “나경원 후보를 거꾸러뜨리길 진심으로 바란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곧 이어 박원순의 당선을 “우리나라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평가하는 독자편지가 온라인 기사로 실렸으며 여기에 대한 이의제기는 등장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다함께는 민노당 내에서 국참당과의 통합을 강력하게 반대해왔다. 일부 좌익들의 냉소적인 태도와 달리, 우리는 민주노동당이 불철저하게나마 노동계급의 조직적 독립을 구현하고 있는 한, 이 투쟁은 비록 한계가 있지만 의미 있는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 투쟁이 국참당 부르주아 세력과의 통합을 막지는 못했고 결국 통합진보당이 결성되었다. 통합진보당의 탄생에 강하게 반대했던 다함께는 태도를 바꾸어 이제 통합진보당의 충실한 지지 모임이 되었다. 통진당은 “여전히 사회민주주의 정당”이자 “참여당과는 다른 개혁주의 노동자 정당”이라고 선언되었다. <레프트21>은 종종 이 정당이 인민전선을 구현하고 있음을 마지못해 인정하였다. 그렇지만 다함께에게는 인민전선 거부라는 트로츠키주의의 원칙을 사수하는 것보다도 통진당이라는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즐길 권리를 누리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2012년 4월 11일의 총선을 앞두고 <레프트21> 78호는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민주통합당의 배신적 전력과 한계를 비판하면서도 비판적 투표 전술을 취할 수 있다. 이것은 민주통합당을 통해서라도 새누리당을 심판하고 싶어하는 2030세대와 소통하기 위한 불가피한 타협이다.”—진보 후보를 지지하고 투쟁을 건설하자

한편 통진당 사태가 터지면서 이 당의 위신이 크게 실추되자 다함께의 충성심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냉소적으로 “인민전선체의 정치적 파산”을 선언하는 한편, “전ㆍ현직 민주노총 리더들”이 “노동계 정당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 바람직한 대안일 수 있다”며 이 당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 다함께는 7월 29일 긴급 대의원협의회를 소집하여 통진당 탈당을 ‘만장일치’로 전격 결정했다. 많이 늦기는 했으나, 올바른 결정이었다. 그러나 성명서(“최소한의 혁신마저 불가능해진 통합진보당에서 탈당한다.” 7월 29일)가 밝힌 탈당 이유는 인민전선과의 단절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들은 “통합진보당 의원 총회에서 이석기 · 김재연 제명안 부결”로 “노동자들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처조차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탈당한다고 선언했다.

대선이 다가오자, 다함께는 “진보대연합체는 독자 후보를 준비하고 출마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성명을 발표하였다(박근혜 패퇴와 노동운동의 전진을 위한 진보정치 연합체가 필요하다, 8월 18일). 그러나 “끝까지 단일화를 거부해서 박근혜 당선에 도움을 줬다는 비난을 자초”하고 싶지 않은 다함께는 야권연대에 “열린” 입장을 가진 노동자ㆍ민중 후보 추대 연석회의(이하 연석회의)를 옹호하면서, 연석회의를 거부하는 좌파들의 “종파적 태도”를 비난하였다. 그러나 연석회의는 곧 해소되었다.

이번 대선에 대한 다함께의 입장을 발표한 글 가운데 가장 최근의 글은 전지윤의 “진보의 재구성과 좌파”라는 글이다. 전지윤은 “민주당ㆍ안철수 등과 분명히 선을 그으면서도 비판적 투표는 할 수도 있”다고 장담한다. 부르주아 후보에게 투표하면서, 어떻게 그들과 “분명한 선”을 그을 수 있다는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부르주아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이 다함께와 그들이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트로츠키주의” 사이에 굵고 깊은 선을 긋는 행위임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인민전선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는 이유

개량주의

개량주의자들은 사회혁명 없이도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모순과 병폐를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기며, 그런 개혁들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평화적으로 집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독일 사민당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의 대중적인 사민주의 정당조차도 단독으로 집권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남한에서 개량주의 정당들에게는 단지 10명 내외의 국회의원을 배출하더라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들은 덜 우익적인, 덜 호전적인, 민주적인 부르주아 파트너와 선거협정을 체결하거나 연립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협정을 맺는 것을 통해서 자신들의 허황된 꿈을 실현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개량주의자들이 의회나 행정부에 입성함으로써 일차적 소원을 성취하더라도 지배계급이 이들에게 부과하는 임무는 자본주의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저항을 체계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임무가 제대로 수행되지 않을 경우 지배계급은 비상수단을 사용하게 된다. 프랑코의 쿠데타,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스탈린주의

스탈린주의는 제국주의의 군사적 압박으로 정치적 공황 상태에 빠진 관료들의 세계관이다. 스탈린주의는, 제국주의라는 당면한 위협에 질식되어, 노동계급의 장기적 국제적 이익을 도모하는 안목을 상실하고, 관료 집단의 당면한 일국적 이익만을 도모한다. 그러므로 스탈린주의자들은 더 적대적인 제국주의 분파(또는 자본가 분파)에 맞서 덜 적대적인 제국주의 분파(또는 자본가 분파–남한에서는 김대중이나 노무현 같은 부르주아 좌파)와의 동맹을 추구하고 이 동맹에 주변국의 사회주의 혁명을 종속시키려 든다. 이것이 스탈린주의가 끝없이 인민전선을 추구하는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대중추수주의

혁명가가 인민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사회주의 혁명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혁명조직이 계속해서 소수로 남아있는 것도 미덕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당분간 혁명가는 소수파로 남아있을 각오를 하면서 인기 없지만 올바른 주장도 할 수 있어야 한다 .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정치조직들이 이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기회주의로 전락하고 만다. 이들은 혁명적 원칙을 사수하기보다 다수 대중의 정서에 영합하고자 한다. “부시 빼고 아무나(Anybody but Bush)” 캠페인이나 “반MB 민주연합”에 대한 좌익들의 투항은 이들에게 여론을 거슬러 “아무리 쓰디써도 진실을 말할” 능력이 없음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한편 일부 기회주의자들은 ‘인민전선에 참여하는 것’과 ‘대중들 사이에서 작업하는 것’을 혼동한다. 이들은 대중을 들먹이면서 자신들의 계급배신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예컨대 다함께는 부르주아 세력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는 좌익들을 “종파적 태도”를 갖고 있으며 “대중운동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비난하고, 자신들의 행태는 “노동자 대중의 정서를 이해하고 그들과 소통하고 연대”하는 것이며 “면밀하게 개입하기 위한 구체적 전술”이라고 강변한다(지방선거에서 좌파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2010년 5월 30일). 1920년대 중반 코민테른에도 이런 유형의 기회주의자들이 있었으며, 이들에게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부하린은 이렇게 묻는다 : ‘국민당 대중은 어떠한가, 이들은 단지 짐승 같은 놈들일 뿐인가?’ 물론 이들은 짐승 같은 놈들이다. 어떤 부르주아 정당의 대중들도 늘 짐승 같은 놈들이다. 비록 정도가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대중은 짐승 같은 놈들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노동자 농민당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자본가계급을 감추면서 대중을 자본가계급의 지배로 내모는 것을 금지시킨 이유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노동자당을 부르주아 정당에 종속시키는 것을 금지시킨 이유이다. 거꾸로 우리는 전 단계에 걸쳐 노동자당을 부르주아 정당에 대비시켜야 한다.”―레닌 이후의 제3인터내셔널

 

2. 노동자주의

노동자주의(경제주의, 조합주의)는 노동계급이 권력 장악의 길로 나아가는 데에 놓인 또 하나의 심각한 장애물이다. 왜냐하면 혁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결정적 연장을 만드는 사업을 지연하고 방해하기 때문이다.

노동자주의는 미래의 지배계급으로서의 사명을 망각하고, 노동계급의 즉자적 일상적 요구에 매몰되어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을 보조하고 지원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자임한다. 이 경향이 지금 남한의 이른바 ‘사회주의 운동’을 지배하고 있다.

노동계급은 미래의 지배계급이지만, ‘각성되지 않은, 현재의, 일국의’ 고립된 노동계급은 자본가계급의 임금노예일 뿐이다. 임금노예로서의 노동계급이 미래의 지배계급으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이 사회를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안목은 인류의 역사적 실천으로부터 괴리된 ‘일국의, 특정 시기’ 노동자의 경험적 실천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일국의, 특정 시기’ 노동계급이 인류의 역사적 실천과 결합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각한 소수의 결집이 필요하다. 그들은 바로 그 인류의 역사적 실천의 총화(우리가 ‘맑스-엥겔스-레닌-트로츠키주의’라고 부르는)에 기초하여 노동계급이 당면한 사안 사안에 대한 과학적 역사적 안목(혁명 강령이라고 부르는)을 자기 것으로 하고, 먼저 그들 스스로 결집하고(선전그룹의 결성), 나아가 노동계급 전체와 결합(당의 수립)한다.

따라서 노동계급이 더 나은 대접을 받는 임금노예이기만을 바라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 썩은 체제로 인한 온갖 악행을 낳는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스스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우리의 임무를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인류의 역사적 실천의 정수와 현재의 노동계급을 결합시킬 것! 혁명 강령에 기초한 혁명 정당을 건설할 것!

그런데 노동자주의자들은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그때그때의 노동자의 자생적 투쟁을 보조하고 지원하는 데에 온 역량을 쏟느라고 이 작업을 등한시한다. 더욱 심각하게는 그러한 자생적 투쟁이 활성화되고 고조되면 당이 건설될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노동계급의 궁극적 해방을 위한 제1의 요건인 혁명정당의 건설은 멀고 먼 일이 되고 있다.

물론 자신 스스로 노동조합의 지도자 또는 노동조합 활동가라고 자임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혁명적 사회주의자’라고 자임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사상을 퍼뜨리고, 혁명운동에 뛰어드는 젊은 인자들을 크게 오염시키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노동자주의는 우선순위의 착오를 낳는다. 인적, 물적 자원을 잘못 배치한다. 자원을 장기적 계획적으로 배치하지 않고 단기적, 임시변통적, 즉흥적으로 소비한다.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그때그때의 투쟁에 매몰되어 그 투쟁을 보조하고 지원하는 것이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혁명적 사회주의 강령을 현재화하는 작업, 먼저 자각한 소수를 양성하는 작업은 뒷전으로 취급된다. 정치적 각을 세우고 옳고 그름을 날카롭게 가르는 정치선전물들은 가뭄에 콩 나듯 찾아보기 어렵고 어느 조직이나 다 그렇게 말할 법한 그렇고 그런 출판물을 내는 데에 정력을 쏟는다. 이리하여 볼셰비키가 아니라, ‘현장’에 뼈를 묻는 것이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사명이라고 믿는 조합주의자들이 복제되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성실하고 헌신적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자본주의 사회의 허황된 꿈을 부나비처럼 좇는 젊은이들에 비하면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고 자기희생적이다. 그러나 노동자주의에 눈이 먼 성실성과 헌신성 그리고 진지함과 자기희생은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목적의식을 잃은 낮은 수준의 그것일 뿐이다. 문제의 근원에 대한 과학적 이해는 사라지고 문제 자체만 그들의 시야에 보인다. 그때그때의 고통에 매몰되어 버린다.

노동자주의자들의 그러한 ‘실천’을 통해 고통이 약간 경감되거나, 때로 일시적 승리를 거두기도 하지만, 문제는 전혀 사라지지 않는다. 기존의 문제와 고통 그리고 그에 대한 자생적 투쟁이 사라지기도 전에 새로운 문제와 고통 그리고 자생적 투쟁이 또 불거진다. 이것은 자본주의 본성 때문이고 그러하므로 이러한 과정은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노동자주의에 눈이 먼 사람들은 그러한 행위가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고, 자부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동을 통하여, 혁명의 운명이 어찌될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자신의 분노 · 양심 · 성실성 등을 가장 손쉽게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8년 촛불시위와 노동자주의

2008년 촛불 시위는 그 노동자주의가 결정적인 국면에서 노동인민을 어떻게 오도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였다.

한미 FTA가 2007년 4월 타결되었다. 한국 노무현 정권과 미국 부시 정권 사이에 체결된 이 조약은 양국의 자본가계급 특히 제국주의 금융자본의 이익 극대화가 그 목표이다. 태생적으로 이 조약은 ‘투자자-국가 소송제(ISD), 제외품목 열거 방식, 비위반 제소, 래칫 조항 등’ 독소 조항을 담고 등장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그런데 2008년 2월 출범한 이명박 정권은 그 해 4월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 조건을 더 완화하는 선물을 부시 정부에 안겨주었다. 이것이 한국인들의, 광우병에 대한 공포를 촉발시켰고 자존감에 상처를 주었다.

새로 등장한 정권이 ‘국민’의 안위보다는 미국의 이익을 더 우선시한다고 여긴 사람들은 5월 초 서울 도심에 모여, 이명박 정권의 새 정책(사실 그 대부분 이미 노무현 정권 때 기초된)들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시위 규모는 점점 늘어나 6월 10일에는 서울에서만 50만 이상의 시위대가 결집하여 밤새도록 시가전을 벌였고 일부는 청와대로 진격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시위 규모가 늘어나도 버티는 이명박 정권을 보면서 시위대는 결정적 한 방을 위해 조직된 노동계급의 참여를 절실히 요구했다. 민주노총엔 파업하라는 요구가 급증했다. 그 동안 자본가 정부와 언론의 이간정책에 휘둘려, 모든 파업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 과거와 사뭇 달라진 양상이었다. 실제로 그 시기에 파업했던 화물연대는 일주일 만에 손쉬운 타결을 얻어내었다. 촛불시위대와 노동자 파업이 결합할 것을 우려한 정부의 신속한 조치의 결과였다. (물론 그 타결 내용은 2012년 현재까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미 수 년 간의 심각한 관료화가 진행된 민노총은 총파업 그것도 정치총파업을 단행할 만한 운동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민주노총과 각종 산별노조의 상층간부들이 개별적으로 시위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들이 촛불시위를 완전히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제스처만 취하고 있었다. 이명박 정권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이 홍역 같은 사태가 하루바삐 가라앉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런 관료들의 행위에 면죄부를 준 것은 소위 ‘사회주의’ 조직들이었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사노련)은 그 대표적 조직이었다. 사노련은 기관지를 통해 ‘미국산 쇠고기 반대 등 촛불시위대열의 요구는 노동자다운 것이 아니고, 자신의 현장의 요구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므로, 노동자 총파업은 촛불시위대의 요구와는 별개의 ‘노동자들만(?)’의 요구로 조직되어야 한다.’라는 조합주의적 주장을 펼치며 방관했다.

촛불시위가 점화되고 그것이 절정에 달하는 한 달 보름의 시간을 허비하던 사노련은 6월 17일 IBT 지지자의 비판(< 촛불정국과 사노련의 조합주의적 기회주의>)을 받고서야, 기존 관점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존의 노동자주의적 태도에서 혁명적 강령을 들고 시위에 본격적으로 합류하는 데에는 또 다른 한 달이 필요했다. 긴 내부 조정 기간을 거친 후 7월 중순 사노련은 드디어 기존의 미망에서 깨어나, IBT 지지자가 제안한 ‘촛불시위에 즈음한 노동자 행동강령’을 수용 보완한 <촛불 노동자 13 대 행동강령>을 들고 거리에 나섰다.

하지만 때가 늦었다. 그 때는 이미 출구를 찾지 못하고 교착상태에 빠진 촛불시위가 사그라지던 때였다. 수 십 일 동안 이어진 시위로 분노와 에너지를 소진한 대부분의 시위군중은 승리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시위에 지쳐 일상으로 돌아간 뒤였다.

그러함에도 자칫 시위군중과 노동자들이 혁명적 강령과 결합할 것을 두려워한 국가폭력기구는 사노련 핵심간부 8인을 국가보안법을 동원하여 8월 26일 구속했다.

 

노동자주의 당건설관

노동자주의자들은 ‘전체는 부분의 총합’이라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즉, 부분을 모으면 전체가 되고, 따라서 전체의 성질은 부분의 성질로 환원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 존재하는 사물은 집합체가 아니라 구조체이다. 즉, 하나의 사물은 단순한 총합이 아니다. 각 부분은 다른 부분과 구별되는 자기만의 독특한 역할을 나누어 맡고 있으며, 다른 부분과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서 자기 역할을 수행한다. 동시에 그 부분은 다시 그것을 구성하는 하위요소의 전체가 되는 단계성을 지닌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그 사물 전체로서의 성질은 부분의 성질과는 전혀 다른, 독립된 것이다.

자전거를 예로 들어 보자. 자전거는 동력을 일으키는 페달, 페달에서 발생한 동력을 뒷바퀴로 전달하는 체인, 자전거를 앞으로 추동하는 뒷바퀴, 자전거의 방향을 조종하는 손잡이 등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페달이나, 체인 또는 뒷바퀴나 손잡이 등이 제 역할을 할 때 실현되는 전체로서의 자전거의 기능은 페달이나, 체인 또는 뒷바퀴나 손잡이 등의 기능으로 환원할 수 없는 전혀 별개의 기능인 것이다.

그러나 구조체와 집합체의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집합체로 바라보는 노동자주의자들은, 개별 노동자와 노동계급, 개별 사업장의 피고용인/사용주 사이의 대립과 국가 권력을 둘러싼 계급적 대립, 각 현장의 조직과 당 조직 등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전자가 모이면 그저 후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한다. 후자를 전자로 치환한다. 그래서 노동자주의자들의 사고 속에서는, 개별 노동자가 모이면, 전체 사회 속에서의 공통의 위치와 역사적 임무에 대한 자각 없이도, 노동계급이 된다. 개별 사업장의 쟁의가 모이면, 전체적인 공동 요구와 전국적 지휘부가 없이도, 총파업이 된다. 개별 사업장의 노동자 조직이 모이면, 인류의 역사적 실천의 총화에 기초한 과학적 혁명 강령을 중심으로 하는 결집이 아니어도, 당이 된다.

이러한 노동자주의적 당건설관이 우리 운동을 지배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표현되는 사노련(2008)과 노건투(2012)의 글을 검토해 보자.

“그들은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노동자 투쟁들을 보면서 노동자 의식을 배우고, 자기 현장에서 노동조합과 같은 노동자의 조직과 투쟁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것들은 다시 조직된 노동자들을 자극하고, 이것들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노동운동의 황금기를 열어낼 것이다. 그 속에서 진정한 혁명적 노동자 정당을 만들어낼 가장 비옥한 토양이 만들어질 것이다.”—사노련, ‘노동자의 운명, 우리 스스로가 개척하자!’, <가자! 노동해방> 8호, 2008년

혁명정당의 건설은 가장 ‘목적의식적인’ 사업이고, 노동자의 경제투쟁은 ‘자생적’이다. 둘은 별개의 것이다. 그런데 노동자주의자들은 전자가 후자에 종속된다고 사고한다. 그리고 레닌의 말처럼 강령을 중심으로 ‘위에서 아래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 현장에서부터 투쟁이 상승하면서 혁명적 정당이 건설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경제주의적 사고를 이름에 새긴 혁명적노동자당건설현장투쟁위원회(노건투)는 2012년 8월 <계급투쟁과 당 건설, ① 1930년대 미국의 사례>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이런 흐름이 건강하게 발전하고 뿌리를 내리려면, 그리고 기존 당 운동의 한계를 근본적으로 뛰어넘을 새로운 당 건설에 성공하려면 반드시 확보해야 할 조건이 있다. 노동자들의 투쟁 물결을 활성화하는 노력과 뗄 수 없이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원리다. 투쟁이 살아나지 않은 시기란 노동자들이 사기저하에 빠져 있거나 자신감을 갖지 못한 시기, 또는 체제에 맞서 싸울 필요성이나 계급투쟁의 정당성을 확신하지 못하는 시기를 말한다. 이런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당은 불가피하게 정치적 후진성이나 소극적인 분위기를 흡수하게 된다. 그런 당으로 개량정당의 한계를 뛰어넘을 순 없다.

 

반대로 투쟁의 상승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지는 당은 노동자들의 진취적인 도전정신과 패기, 전진하는 에너지를 흡수하게 된다. 이렇게 당이 등장할 때 비로소 기존 개량정당의 정치적, 조직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역시 가장 ‘목적의식적’ 사업인 혁명정당의 건설을 ‘자생적인’ 노동자의 경제투쟁에 종속시키는 당건설관이다. 혁명정당이 각 시기의 계급 역관계에 영향 받지 않을 수 없겠지만, 각 시기 노동자의 즉자적 의식 상태 즉, “사기저하”나 “전진하는 에너지”를 “흡수”할 정도로 사상적으로 휘둘리는 당은 즉, 자생성에 굴종하는 당은, 필연적으로 개량주의 정당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계급역관계는 주객관적 상황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며 변화한다. 하지만, 과학적 사상으로 무장한 혁명정당은 그 때마다 개량과 혁명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해서는 안 된다.

계급역관계에 따른 노동투쟁 상황이 어떠한가에 상관없이 혁명정당은 건설되어야 한다. 투쟁의 상황과 상관없이, ‘의식적으로’ 혁명사상을 수용하는 선진분자를 결집하고, 학습 연구 • 선전을 통해 혁명사상을 현재화하는 작업을 끈기 있게 진행해야 한다. 이러한 ‘혁명정당의 시초축적 과정’ 없이 혁명정당은 건설되지 않는다. 볼셰비키는 투쟁의 “상승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당이 아니었다. 그러나 혁명적 당이었다. 볼셰비키 당은 1917년 혁명을 지도하기까지 혁명 강령을 현재화하고 기간 인자를 양성하며 당 내외의 기회주의와 맞서 싸우는 대단히 의식적인 작업을 오랜 기간 끈기 있게 수행했다.

그런데 터무니없게도, 노건투의 필자는 자신들의 노동자주의적인 당건설관이 1930년대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건설 경험으로부터 얻은 것이라고 말한다.

“‘노동자투쟁의 활성화’, 특히 단사 현장에 갇히지 않는 계급투쟁의 전망과 결합할 때 새로운 당 건설운동은 실제적인 전진의 동력을 얻게 될 것이다. 새로운 당 건설을 원하는 노동자가 미국의 사례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같은 글

그러나 당사자들은 그러한 교훈을 준 바 없다고 부정한다. 미국 SWP의 탁월한 지도자 제임스 캐넌은 미국에 혁명적 대중정당을 우뚝 세우기 위해서 끈기 있는 ‘혁명정당의 시초축적 과정’이 필요했다는 것을 설명한다. 다음은 그런 설명 가운데 몇 구절이다.

“…물론 당신은 혁명을 이끌 당을 건설하기 위하여 대중을 향한 길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중을 향한 길은 전위를 통해 나 있으며, 그것을 우회할 수 없다. 몇몇 사람들은 이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공산주의적 노동자들을 제쳐두고 대중운동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거기서 가장 선진적이며 이론적으로 계발된 그룹 즉, 전위 중의 전위인 좌익반대파로 인입할 최상의 인자들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은 조급함과 몰이해의 산물로, 잘못된 것이다. 그러한 시도 대신, 우리는 선동이 아닌 선전을 주된 임무로 삼는다.” <미국 트로츠키주의 운동사>, 제임스 캐넌

“우리는 말했다: 우리의 제1 목표는 좌익반대파의 정치원칙을 전위[선진노동자]에게 알리는 것이다. 당장 훈육되지 않은 거대한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속이지 않아야 한다….” 같은 글

과연 남한 사회주의 운동은 ‘혁명정당 건설을 위한 시초축적’은 끝났는가? 혁명 강령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이해한 핵심인자들이 결집되어 있는가? 그 작업을 건너뛰어도 혁명정당 건설이 가능한가?

 

노동자당 건설을 위한 사노위 실험

2010년 5월, 당시 사노준과 사노련의 한 분파를 중심으로 ‘사회주의노동자당건설을위한 공동실천위원회’(사노위)가 출범하였다. 사노위의 목표는 “당 강령·규약의 정립과 선진노동자들 사이에서 실천적 권위 확보를 통해” 사회주의노동자당을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출범선언문이 밝힌 것처럼, 강령수립 작업이 시작되었고, 그것은 곧 각종 사상이 옳고 그름을 다투는 정치투쟁의 과정이었다. ‘사회주의’ 운동권 내에 횡행하던 스탈린주의, 클리프주의, 좌익공산주의, 트로츠키주의, 포스트주의, 여성주의 등 각종 사상경향들이 드러났고 충돌했다.

그 과정에서 3개의 강령안이 제출되었다. 각 강령안은 스탈린주의, 포스트주의 그리고 부문주의가 어지럽게 섞인 ‘3인안’(다수파), 국가자본주의론적 관점을 공유하는 클리프주의와 좌익공산주의가 결합한 ‘5인안’(소수파), 트로츠키주의의 퇴보한 노동자국가론을 중심내용으로 하는 ‘4인터안’(극소수파)이었다. 3개의 강령안은 강령위원회, 각 지역, 전국 토론 등을 거치며 자유로운 논쟁을 통해 경쟁하였다. 그 과정에서 사상과 강령의 중요성이 확인되었다. 국가자본주의론의 비과학성이 폭로되었다. 사회주의 사상의 하나로 공고한 권위를 인정받던 여성주의가 도전받기 시작했다.

국가보안법의 압박, 소련 붕괴로 인한 오랜 사기저하 그리고 노동자주의의 ‘현장/실천 제일주의’의 지배로 인해 정치투쟁이 짜부라든 풍토에서 1년여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정치지형이 분명히 드러나고, 각 경향 내에 부분적인 상호침투가 있었지만, 중요한 강령적 문제들은 여전히 해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

노동자주의의 압력에 쫓기고, 그것과 연관되어 혁명 강령의 과학성을 사활적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 사노위 다수파 지도부는, 하면 할수록 자신들의 개량성이 공격받는 피곤한 강령논의를 종료하고 싶어 했다. 2011년 9월 4차 총회에서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성격, 북핵에 대한 태도, 남한 자본주의의 성격 등 핵심적이고 예민한 강령적 주제는 내버려둔 채, 그 때까지의 논의에서 공통으로 수용하는 부분만을 모은 안을 단일안으로 가결했다.

‘4인터안’을 제출하며 정치투쟁에 참여했던 IBT 지지자들은, 이러한 ‘공통분모안’은 현실에 대응하지 못하는 무용지물 강령안이 될 것임을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이 초안은 “세계에 대한 총체적이고 과학적 해석”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없으며, 일상적으로 터져나오는 대중투쟁을 지원하고 지도하는 데에는 일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권력장악으로 이끌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예컨대, 소위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실패했다. 우리가 타도해야 할 일차적 대상인 남한 자본주의의 성격은 단지 두루뭉술하게 언급되는 것으로 그쳤다. 이러한 강령으로는 앞으로 다가올 것으로 예상되는 북한/중국의 격변, 제국주의 자본/군대/정보기관을 배후에 둔 남한 자본가 계급과의 일전을 목전에 두고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년 천안함 사태가 발생했을 때, 그리고 올해 리비아의 카다피와 리비아 인민 사이의 내전 그리고 NATO의 침략이 있었을 때 우리는 일관된 입장을 가지지 못했었고 지금 역시 그러하다. 내부의 토론이 전개된 적도 없다. 아마 앞으로도 이런 사안이 제기되면 잠자코 예민한 사태가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결정적인 때에는 혁명이 지나갈 것이다.”—강령채택건에 대한 입장: 사노위 4차 총회에 부쳐, 2011년 9월 3일

4차 총회에서 강령안의 졸속 채택은 사노위 내 정치투쟁의 종료를 의미했다. 이후의 과정은 강령적 후퇴의 연속이었다. 4차 총회가 채택한 강령안의 긍정적인 부분마저 흠집내려는 비판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급기야 6차 총회에서는 그 강령안마저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2011년 12월 통합진보당이 결성되고 민주노총 다수파에 반하여 그에 반대하는 선언자모임이 결성되었다. 그러자 민주노동당이 놓고 간 빈자리를 차지하고 통진당을 반대하는 노동자들을 끌어들겠다는 조급한 욕망으로 결국 2012년 3월 6차 총회에서 기존의 강령안을 무력화시키는 정책안을 통과시켰다. 그것은 혁명 사상으로 응집하여 당건설의 주력부대를 구축하기보다는, 정치적 내용을 완화하여 외연을 넓히는 방식으로 당을 건설하겠다는 태도의 표현이었다. 이 역시 노동자의 현재적 의식을 추종하는 노동자주의적 태도의 표현이었다.

사실 그런 방식으로 건설된 당의 대표적 사례는 민주노동당이다. 민주노동당은 그러한 방침에 따라 건설되었고 그러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민주노동당은 혁명 강령에 입각한 혁명정당이 없이도 노동자권력을 수립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환상에 취했고 자본가계급의 인력에 이끌려 우경화를 지속했다. 결국 2011년 12월 자본가 분파의 하나인 국민참여당과 합당하여 통합진보당을 결성하면서 노동자당으로서의 자신의 생명을 마감했다.

 

‘변혁모임’과 대통령후보 전술

사노위는 6차 총회 결정 이후 ‘변혁적 현장실천과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을 위한 전국활동가대회 조직위원회’(변혁모임)의 결성을 주도했다. 이 변혁모임은 민주노동당의 소멸 그리고 통합진보당의 파산으로 생긴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사노위와 민주노총 소수파가 중심이 된 조직이었다. 다양한 ‘사회주의’ 조직들도 가세했다.

그런데 변혁모임은 구성되자마자, 두 달 남짓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서 대통령후보 전술을 구사하겠다고 결의했다.

“대선투쟁을 통해 현장투쟁과 대중투쟁 강화·노동자 민중의 정치·계급의식을 고취해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의 토대를 마련하고, 현장 노동자 정치를 강화하는 대선투쟁을 전개한다.”—2012년 10월 14일, 변혁모임 전국활동가대회 결의문

대선이라는 대형 정치이벤트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결집시키면 노동자정당을 쉽게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는 무망한 기대의 발로였다.

대통령 선거는 대중의 높아진 정치적 관심으로 인해 노동전위에게 정치 선동의 장을 더 폭넓게 제공하기도 하지만, 자본가계급의 정치적 인력이 극대화되는 장이기도 하다. 실제로 과거 민주노총의 지도자들이 문재인이나 안철수 같은 부르주아 후보들의 진영으로 대거 들어갔다. 최종투표일이 다가올수록 최악의 결과를 막아야 한다는 차악론은 또 다른 강력한 흡인력으로 이른바 노동자 정치진영을 자본가계급 쪽으로 끌어당길 것이다. 게다가 후보전술은 대규모의 인적/물적 자원을 요구한다. 전국을 유세지로 하는 대통령선거일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부르주아 진영의 양대 후보는 지난 선거에서 각각 4백억 가까운 선거자금을 썼고, 이번 법정선거비용제한액은 559억 7700만원이라고 한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선거에서 후보전술을 구사할 때에는 전술의 손익에 대한 엄밀한 타산은 물론이고,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정치적, 인적, 물적 자원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소중한 자원을 탕진하거나, 노동계급 견인은커녕 눈에 보이지 않는 자본가계급의 인력에 이끌려 자기 자신이 우경화될 위험이 있다.

단독으로 후보전술을 구사하기에 힘에 부치는 변혁모임이 진보신당에 정치적 구걸행위를 한 것은 우경화의 단적인 사례이다. 진보신당은 지난 4월 총선에서 자본가계급과의 야권연대를 갈망했고, 그것이 무시당하자 통합진보당을 자본주의 검찰에 고소한 바 있으며, 더 이전에는 민주노동당에서 종북주의 논란을 일으키며 국가보안법에 굴종한 전력이 있는 정당이다. 당장의 후보전술을 위해 한 명, 한 푼이 급한 변혁모임은 공동 사업을 추구하면서 이러한 문제들을 전혀 제기하지 못했다.

나아가 우려스러운 지점이 있다. 변혁모임의 후보가 대단히 대중추종적인 선거운동을 펼치고 있고 바로 그것 때문에 오히려 ‘투쟁하는 노동자’의 투표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다. 변혁모임의 김소연 후보가 가장 자신 있게 내세우고 있는 것은 ‘투쟁하는 노동자를 누가 가장 잘 대변하겠느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현재 투쟁에 나서고 있는 개별노동자들의 요구를 혁명적 ‘번역’(노동계급 전체의 요구 수준으로, 권력지향적으로, 사회주의적으로) 없이 ‘그대로’ 수용 · 추종하고 있다.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라. 정리해고를 중단하라. 해고자를 복직시켜라.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라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요구들은 자본주의적 요구들이다. 꼭 사회주의가 되어야 실현가능한 요구들이 아니다. 따라서 그러한 요구를 ‘있는 그대로’ 제출하게 되면 투쟁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다른 노동자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아이러니하게도 임금과 고용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는 노동자들의 구체적 지지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다른 투쟁 사업장 출신 노동자들로 구성된 변혁모임과 그 후보가 그런 요구들을 공감은 해줄지언정, 이루어줄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겉으로나마 해결을 약속하는 자본가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자신들의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라도 그 후보에 투표하는 것이 차라리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혁모임의 후보가 주력하는 투쟁사업장 방문은 사실 대통령후보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대통령후보가 되고 수억 원의 입장료를 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기왕 대통령후보가 되었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은 개별노동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임금인상이나 고용 약속(물론 그것도 의미 있지만)만 하는 등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과 실업과 자살을 양산하는 현 사회의 모순을 설명하고,

-문재인과 민주통합당이 지난 정권 때 실행했던 친제국주의적, 친자본적, 반노동계급적 정책들을 언급하면서 새누리당과 다를 바 없는 자본가계급의 후보라는 것을 각인시키고,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의당의 계급배신행위를 폭로하며,

-기간산업/은행/기간산업시설 등의 몰수를 통해,

-무상 교육/의료/노인부양/주택 등을 보장하고,

-실업을 폐지하고 노동시간을 단축하며

-이주노동자들에게도 똑같은 권리를 제공하며,

-동일노동 동일임금 등을 통해 모든 차별을 일소하겠다고 선전/선동하는 것이다.

 

결론

18대 대선의 출마자들

18대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새누리당의 박근혜,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통합진보당의 이정희, 무소속의 박종선, 김소연, 강지원, 김순자 후보(기호순) 등 7명이 출마했다.

새누리당의 박근혜는 부르주아 극우파를 대표한다.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하여 79년 암살되기까지 근 20년간 철권통치를 휘두르며 친미, 친자본, 반노동인민 정책을 밀어붙인 박정희의 친딸이다. 육친적 관계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남한 사회 지배계급 주류의 계승자이다.

민주통합당의 문재인은 남한 부르주아의 왼쪽 분파를 대표한다. 상대적으로 약간 자유주의적이나, 인적 구성과 정책 측면에서 근본적 차이점은 없다. 이들 분파는 1997년 IMF 경제위기 때 사회혼란을 저지할 적임자로 김대중이 당선된 이후 노무현으로 이어져, 2007년까지 10년간의 통치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 시기를 통해 노동인민에게 이들이 입증한 결론은 ‘자본가계급은 왼쪽이건 오른쪽이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똑같이 친미, 친자본, 반노동계급 정당이며 후보이다. 노동계급으로서 우리는 이들에게 어떠한 이유로든, 어떠한 형태의 지지도 보낼 수 없다.

통합진보당이 결성되기 이전 민주노동당은 자본주의적 강령을 지니고 있으나, 노동계급의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는 ‘부르주아 노동자당’이었다. 하지만 자본 진영의 인력에 이끌려 개량적 환상을 좇아 계속 우선회하다가 2011년 부르주아 분파와 통합하여 통합진보당이라는 이름의 인민전선 정당이 된 이후로는 어떤 면에서도 더 이상 노동계급을 대표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 남한 노동계급은 앞으로의 유사한 배신을 경계하는 지표로 오늘 이들의 배신을 기억할 것이다.

한편, 무소속의 김소연과 김순자 후보는 모두 ‘노동자대통령’을 표방한다. 변혁모임을 대표하여 출마한 김소연은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분회장으로 파업과 단식투쟁 등 1895일간의 투쟁 끝에 2010년 11월 1일 정규직화 합의를 이끌어낸 노동자투쟁의 ‘영웅’이다. 진보신당의 분파 하나가 무소속으로 출마시킨 것으로 알려진 김순자는 가장 열악한 처지의 노동자 집단 가운데 하나인 청소노동자 출신이다. 민주노총 울산지역연대노조 울산과학대학교 지부를 결성하고 장기 투쟁을 승리로 이끈 주인공이다.

‘노동자대통령’임을 내세우지만 두 후보 모두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과 사회주의와 그리고 그 구체적 내용인 이행강령을 전면에 제기하지는 않는다. 대체로 지금 파업이나 농성 중인 노동자들의 현재적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거나, 같은 노동자 출신이므로 노동자의 요구를 제일 잘 알지 않겠느냐는 호소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를 비교하자면, 보다 사민주의적인 김순자 후보에 비해, “주한미군 철수”, “한미동맹 폐기”, “금융, 에너지, 통신 등 주요산업의 몰수와 사회화” 등 보다 급진적 요구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김소연 후보가 상대적으로 더 낫다.

 

김소연 후보에 대한 우리의 입장

그러나 변혁모임의 김소연 후보는 조합주의적이고 대중추수주의 정치를 대표하고 있다. 그리하여 결국 개량적이다. 거듭 말하지만 노동자 전위의 임무는 노동계급의 현재 의식과 투쟁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 자신의 역사적 지위와 임무를 자각하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 기왕 버거울 정도로 많은 자원을 투여하여 이번 대선 연단을 이용하기로 했다면, 그 기회를 십분 이용해야 한다. 즉, 이 사회의 각종 모순이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에 기초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롯되는 것을 폭로하고, 노동계급 전체에 권력의지를 촉구해야 한다. 그것은 곧 이행강령의 선명한 제기로 표현될 것이다.

그러나 변혁모임과 김소연 후보는 그러하질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대선 강령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먼저, 유세 현장이나 선전물을 통해 전면으로 부각되는 것은 ‘비정규직 철폐, 정리해고 철폐’이다. 지지되어 마땅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심지어 부르주아 후보들하고도 선명하게 구별되지 못하며, 왜 ‘노동자대통령’이 유일한 대안인지를 설명할 수 없다.

둘째, 자본주의의 온갖 병리적 증상의 근본적 원인인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의 철폐에 대한 도전인 ‘기간산업, 금융, 사회간접자본 등의 몰수와 사회화’라는 구호가 전면화되지 않고 있다. ‘몰수와 사회화’는 ‘비정규직 철폐, 정리해고 철폐, 무상교육, 무상주택, 실업 해소, 노동시간 단축’ 등을 가능하게 할 유일한 조건이다. 즉, 기간산업과 금융 등의 이윤 부분을 사회가 장악하여 그 재원으로 무상교육, 주택, 의료를 제공하고 그 사회화된 산업들을 중심으로 비정규직과 정리해고를 철폐하고 노동시간을 단축하며 나아가 전 사회적으로 확대하여 실업을 철폐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변혁모임과 김소연 후보의 정책에 그와 비슷한 내용이 담겨있긴 하지만, 구석에 숨어있고, 개량적 요구들 즉, ‘세제 개편, 투기자본 몰수, 불로소득 중과세, 재벌 재산 몰수’ 등과 같은 수준이거나 하위의 것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그 진정성을 의심스럽게 한다.

셋째, 중동, 중앙아시아, 중남미 등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와 동아시아 군사적 긴장의 근본원인은 제국주의에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자들은 중국과 북한에 자본주의 질서를 재구축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런데 변혁모임과 김소연 후보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긴장을 말하면서 이를 해결할 근본적인 처방을 제시하는 대신에 이러저러한 ‘평화주의적 소망’만 나열한다. 특히 북한의 핵무장은 미일 제국주의의 무력도발에 맞선 자기방어의 정당한 권리로 옹호되어야 하지만,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변혁모임과 김소연 후보는 결코 노동계급을 궁극적 해방으로 인도할 지도부가 될 수 없다. 현재의 불철저한 강령과 노동자주의적(전투적 조합주의) 실천은 장차 또 다른 개량주의 정당의 출현을 예고할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번 대선에서 변혁모임과 김소연 후보의 이러한 점을 경계함과 동시에 그에게 투표할 것을 남한 노동계급에게 촉구한다. 왜냐하면 김소연 후보는 최소한 노동계급의 자본가계급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표현하고 있으며, 출마한 후보 중 노동계급의 이해에 가장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 과제: 혁명 지도부의 수립

결국 우리의 과제는 또 다시 혁명적 지도부의 건설이라는 문제로 환원된다. 지난 20년간 견고하게 지탱해 왔던 자본주의 불패 신화가 경제위기로 무너지고, 세계 노동계급은 새로운 대안을 찾아 나서고 있다. 전통적 지도부는 체제를 지탱하는 도구가 된지 오래지만, 그를 대체할 혁명적 지도부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인류의 위기를 해결할 유일한 대안인 볼셰비키-레닌주의 강령에 기초한 혁명적 지도부의 건설을 위한 정치 · 조직적 재편 사업에 우리는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2012년 1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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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독자 2022.02.21 14:02
    사노위 3인안에 스탈린주의적 내용도 포함되어있었나요?
  • ?
    볼셰비키 2022.02.21 14:34
    어떤 맥락의 질문인지 설명을 좀 더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
    독자 2022.02.21 19:41
    제가 알기로 사노위 3인안은 변혁당의 전신입니다,
    그런데 글에서 3인안을 설명할 때 “스탈린주의, 포스트주의 그리고 부문주의가 어지럽게 섞인”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어떤 점에서 3인안이 스탈린주의적이었는지 궁금합니다.
  • ?
    볼셰비키 2022.02.21 21:37
    우리 사이트에 있는 <제4인터안에 기초한 3인안과 5인안 비판: 초초안>과 <제4인터안 해설과 3인안과 5인안 비판: 초안>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그 중, 질문하신 내용은 아래의 구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노동계급의 강령은 이 문제를 해명해내어야 한다. 이 문제를 해명하는 관점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그것은 스탈린주의, 국가자본주의론, 트로츠키주의이다. (중략) 넷째, 사노위 내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을 것으로 여겨지는 3인안은 이 세 범주에 들어있지 않다. 실례를 무릅쓰고 그 동안의 추측을 발언한다. ‘과거 스탈린주의에 기초해 있었으나 소련 붕괴로 정치적 진공 상태에 놓인 노동계급의 분파’를 이 3인안은 대표하고 있다. 위의 세 방향 어디로도 가지 않은 이 분파는 소련 붕괴 이후 정치적 진공상태에 놓였고 그 진공으로 페미니즘, 생태주의, 포스트 맑시즘 등 잡다한 사상이 스며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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