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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국가(소련/중국/북한 등)의 사회성격
2015.07.25 16:23

(IBT) 1989년 사태 25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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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사태 25년 후


보리스 카갈리츠키, 크리스토프 리첸버그, 멜 로센버그

오리너구리평론 75호 2015년 4월

 

1989 혁명 25주년을 맞아 오리너구리협회는 좌익에게 1989년이—소련 권역 ‘나라들의 가을’—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논의하는 국제 토론회를 열었다.  2015년 2월 17일 뉴욕 대학에서 열린 토론회는 모스크바에 있는 글로벌리서치 사회운동연구소 이사 보리스 카갈리츠키, 국제볼셰비키그룹 지지자 크리스토프 리첸버그, 시카고 정치경제그룹 회원인 멜 로센버그가 발표자로 참여했다. 다음은 그 토론회 초록을 정리한 것이다. 전체 녹취는 다음 주소에서 들을 수 있다.

 

모두(冒頭) 연설들 [위에 언급된 세 명의 연설이 있었지만, 여기서는 IBT 지지자 크리스토프 리첸버그 동지의 연설만 번역해서 싣는다.]

 

1. 크리스토프 리첸버그

동독이라고 알려진 나라의 붕괴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한다. 나는 독일식 약자인 DDR(독일민주공화국)로 부르는 것을 선호한다. [본 연설에선 모두 ‘DDR’로 표현하지만, 한국독자의 편의를 위해 ‘동독’으로 번역한다.] 나는 동독이 어떤 나라였는지, 1989~90년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혁명사회주의자들이 벌어진 사건들에 대한 대응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동독은 냉전의 산물이다. 그런데 그 서쪽에 비해 역사적으로 보다 진보적이었다는 점은 기억되어야 한다. 동독은 노동자를 억압하고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한 스탈린주의 정권이 통치했다. 계획경제는 노동자의 개입 없이는 성공적으로 운영될 수 없다. 그리고 동독 노동자들은 거의 개입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은 또한 상당한 양의 사회적 성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 성과들은 무료 의료, 모든 가정이 이용할 수 있는 아동보육 시설, 쉬운 낙태 그리고 실제적으로 완전한 고용 등을 포함한다. 미국에 사는 사람들도 얻기 힘든 이 모든 것들을 동독 시민들은 누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를 ‘기형적 노동자국가’로 칭하는데, 이는 소련과 구조적으로 아주 유사한 체제이다. 스탈린주의자들이 동독을 지배했지만 그들은 계획경제에 기초해 있었다. 비민주적이긴 했지만 여전히 그것은 계획경제였다. 이윤을 지고의 원칙으로 삼는 자본주의와 다른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이윤 지상의 원칙은 소련이나 동유럽 또는 동독에 존재하지 않았다.

1989~90년에 펼쳐진 사건들엔 두 개의 전조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폴란드 자유연대노조(Solidarność)이다. 1980년 폴란드 노동자들은 스탈린주의 지배자들에 맞서 독립노조를 건설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것은 1981년 무렵 친자본주의 조직으로 변했고, 이후 1989~90년에 폴란드의 권력을 장악했다. 동독 노동자들은 폴란드를 눈여겨보았고 지배엘리트에 맞서 노동자들이 조직된 것을 목도했다. 그것을 기억하고 영감을 얻었지만 많은 점에서 잘못된 정치적 이유로 인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동독에서 펼쳐진 일들에 대한 중요한 전조였다. 중요한 또 다른 전조는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를 도입한 소련의 고르바초프 정권이었다. 글라스노스트는 높은 수준의 투명성을 의미하는 것이고 페레스트로이카는 구조조정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종종 친자본주의적 방향으로 계획경제를 구조 조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예를 들어 미국 회사와의 합작회사를 차리는 것이 허용되었다. 무엇보다도 동독에서 발생한 사건들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동유럽에 대한 불개입 정책을 고수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동독 정권은 고르바초프가 택한 노선을 거부했다. 동독 통치자들은 고르바초프를 따르지 않았고 그를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았다. 동독 정권이 고르바초프를 거부한 반면, 점점 더 많은 동독 인민들은 그 정권을 거부했다. 동독의 많은 인민들은 개혁을 원했고 그들은 고르바초프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사회에 진짜로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랐고 그동안 강제되어온 여행규제가 사라지길 바랐다. 동독의 보통 시민들은 서방으로 여행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그들은 휴가철에 오직 바르샤바조약 나라들로만 갈 수 있었다. 그들은 지배정당인 사회주의통일당(Socialist Unity Party)의 정치독점을 끝내기를 원했다.

1989년 동안 많은 도시들에선 시위가 벌어졌고, 거리에 나온 인민들은 그들이 원하는 개혁에 대해 토론했다. 가을 무렵 시위는 규모가 커졌다. 그들 안에는 두 정치경향이 존재했다. 하나는 서방으로 가기 위해 단순히 동독을 떠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거의 25만 명 정도가 1989년에 떠났고, 대부분 젊은이들이었다. 다른 정치경향이 생겼고 다수를 구성했는데 현재의 정권을 개혁해야 한다는 사람들을 포함했다. 나는 지금 개혁이 단순히 자본주의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조금 더 나은 것을 바라는 것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많은 인민들이 자신들을 위해 작동하게 하고픈 그 당시 동독 사회주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더 나은 진정한 사회주의를 원했다.

1989년 가을의 이 같은 정세 속에서 다양한 정치경향들이 나타났다. 일찍이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s)과 민주주의 지금(Democracy Now)이 존재했다. 이들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친자본주의적이었다. 그들은 사회주의를 원하지 않았고 서방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선호했다. 그들은 서독 사회민주당의 닮은꼴이었다. 또한 민주적 개혁을 추구하는 동독 모든 인민의 단결을 목표로 하는, 지식인들이 주도한 뉴포럼(New Forum)이 있었다. 인민을 단결시키겠다는 뉴포럼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1990년 1월 경 사회주의 목표와 관심 없다고 말하며 그 오른쪽 분파가 떨어져나갔다. 그리하여 동독의 좌익-사회주의 대안을 주창하는 통일좌파(United Left)가 생겼다. 그 내부엔 몇몇 정치경향들이 존재했는데, 지배정당인 스탈린주의당의 전 당원들도 있었다. 1,500명 규모였지만 노동자들은 소수였다. 한편 보수 세력들도 아주 빠르게 성장했다. 서독 기독교민주연합을 따르는 독일사회연합(Social Union)이 그 중 하나였고 대단한 보수 성향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최소는 아닌, 동독 페미니즘 운동의 시작을 대변하는 독립여성연합(Independent Women’s Union)이 있었다. 그 회원들은 <평화를 위한 여성 네트워크(Women for Peace network)>에서 왔고 레즈비언 활동가들을 포괄했다. 이 조직은 이후 1990년에 녹색당과 선거동맹을 구성한다.

1989년 9월과 10월 시기, 주요 도시들에서 대중 시위가 벌어지고 작은 도시들에선 수백 명이 참가하는 시위가 벌어져 스탈린주의당 본부 건물 앞에 모여 그들의 사퇴를 요구했다. 동독 전역은 들끓었다. 이 정치 사건 속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은 통제력을 잃었다. 헌법에 새겨지고 40여 년 동안 건재하던 그들의 권력 독점은 급기야 파괴되었다. 많은 인민들은 “더 이상 그들이 필요하지 않다.”라는 것을 깨달았고, 지배정당은 이제 그들의 명령을 따를 사람이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대중 행동 속에서 그들의 정치독점은 진정으로 파산했다. 인민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주의에 대한 대안을 찾고 있었다.

동독의 지배정당이 모든 여행규제의 폐지를 11월 9일 선언했을 때 사태는 절정에 달했다. 이 선언은 베를린장벽의 붕괴로 알려지게 된다. 이는 또한 새로운 움직임을 낳았다. 장벽이 무너진 이후 12월 경 동독의 분위기는 달라졌다. 인민들은 강하든 약하든 간에 통일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지난 몇 달 동안 통일은 주요 의제가 아니었는데, 12월 무렵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통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현상은 시위 구호가 달라지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0월의 슬로건은 ‘우리 인민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라는 대중적 지향을 표현하는 “우리가 인민이다(We are the People).”였다. 12월 무렵 슬로건은 바뀌어 “우리는 하나의 인민이다(We are One People).”로 되었고 그것은 서독과의 통일을 바란다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에 대한 우려는 넓게 퍼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동독의 서독 자본주의로의 흡수를 의미하는 것일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1990년 3월 18일 치러진 선거로 보수 세력 연합체인 독일연합(Alliance for Germany)이 압도적 다수가 되었다. 지난 9월에 등장했던 새로운 정당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거의 아무도 그들에 관심을 주지 않았고 다수 인민은 기독교민주당이나 독일연합에 투표했다. 이것으로 통일로 가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 모든 사건들에서 중요한 요인들 가운데 하나는 노동계급은 의식적 세력으로서는 정치무대에 한 번도 서지 않았다는 점이다. 경제파업들이 조금 있었고 상점 직원위원회가 구성되었지만, 자신의 강령과 권력 의식으로 조직된 노동계급은 없었다.

그 당시 어떠한 정치 전망이 필요했는지에 대한 내 생각을 결론으로 말하려 한다. IBT의 전신인 독일제4인터내셔널그룹(German Gruppe IV Internationale)과 볼셰비키그룹이 그 당시 있었다. 그 당시 이 두 조직은 상당히 유사한 선전물을 내고 있었다. 접근법이 같았기 때문에 우리는 합쳤다. 우리는 노동자평의회 건설을 주장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스탈린주의 지배자들에 맞서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재도입에 반대하여 노동자의 대안권력의 기초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시위에 참여하여 스탈린주의 경찰국가 대신 노동자 민주주의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주의자로서 우리는 항상 자본주의 부활 위험에 처한 동유럽의 사회성과 방어 편에 섰다. 우리가 출판한 1990년의 팸플릿을 통해 “스탈린주의를 파탄내자! 자본주의 반혁명에 맞서 투쟁하자! 노동자 정치혁명을 위하여!”등의 구호를 제창했다. 그것이 당시 우리의 노선이었다. 이 정책들은 당시 많은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옳은 노선이었고 그것을 위해 싸워야 했다고 믿는다. 진실로 문제는, 혁명정당의 부재 속에서 동독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적 재통일에 대한 의미 있는 대안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이나 그동안 거부했던 것[스탈린주의 정권]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을 건설할 능력이 있는 대안 세력을 그들은 떠올릴 수 없었다. 혁명정당이 그 당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대안은 존재할 수 없었다.

전체적으로 그 사태에 대한 좌익 대다수의 대응은 최악이었다고 생각한다. 서방의 이른바 사회주의자들은 소위 ‘민주적’ 변화의 단순한 치어리더들이 되었다. 그들은 스탈린주의의 종식이 마치 노동계급의 자유 시대를 여는 관문이 될 것처럼 환호했다. 많은 좌익 조직들이 동독과 소련에 존재하던 진정한 사회성과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분석에 이 사회성과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 실제로 동독 노동자들이 누린 자유는 주로 통일 이후에 벌어진 국가 산업의 총체적 파괴로 실현되었다. 통일 이후 수년 사이에 동부의 실업률은 치솟았고 몇몇 지역은 25~30%에 이르렀다. 노동자들은 쫓겨났고 그것을 대신할 다른 것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자본주의 통일이 낳은 효과 가운데 하나였다. 말했던 것처럼 동독은, 그 당시 엄중했다. 인기 있지는 않지만 꼭 필요한 것을 말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형적노동자국가의 방어는 스탈린주의를 방어하는 것이 아니다. 독일 스파르타쿠스동맹이 추구했던 것과 달리, 우리는 그들과의 단결을 원치 않았다. 또한 우리는 스탈린주의 관료 내 개량주의 분파들에 대해 경고했는데, 그 분파는 결국 동독을 서독제국주의에 팔아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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