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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출처 – 국제볼셰비키그룹(IBT)



소련의 관료지배층은 계급이 아니었다

‘모든 정치색깔이 공존했다’

 

 

트로츠키는 1930년대 소련 스탈린주의 관료 지배층의 정치적 사회적 성격을 분석하였다. 특히 그는 관료집단의 “단일 체제적” 통일성의 외양 뒤에 감추어져 있던 정치적 이질성을 크게 강조했다. 제 4 인터내셔널의 1938년 창립 문서인 <이행 강령>에서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정치색깔이 소련관료집단에 공존했다: 이그니스 라이스의 진정한 볼세비키주의부터 부텐코의 완벽한 파시즘까지 모든 정치 스펙트럼이 존재했다.”

 

라이스는 서유럽에 파견된 소련의 정보원이었다. 그는 1937년 7월 제 4 인터내셔널의 노선을 공식 지지한 후 몇 주 후에 스탈린주의 요원에게 살해당했다. 부텐코는 소련의 외교관이었다가 1938년 초 무쏠리니가 정권을 잡고 있던 이탈리아로 도망쳤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과 자본주의 반혁명의 공공연한 대리세력인 “부텐코 분파”가 서로 충돌할 경우 관료집단 내부의 극소수 혁명 분자들 즉 “라이스 분파”는 일시적으로 스탈린주의자들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트로츠키는 주장했다.

 

소련 관료집단에 대한 트로츠키의 분석은 1991년 8월 러시아 반혁명의 승리 때까지의 모든 정치 사건들을 통해 확실히 입증되었다. 1930년대 스탈린의 피의 숙청으로 트로츠키주의 좌익반대파와 레닌의 볼세비키당의 중핵들 대부분이 제거되었지만 관료집단 최상층은 아래로부터의 대중 반란에 대해 조금도 걱정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1962년 6월 남부 러시아의 노보체르카스크에서 물가 인상에 항의해 인민이 자발적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소련공산당 지도부는 크게 동요했다. 이 저항운동은 이 도시의 전기기관차 공장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6월 21일 군대는 중앙광장에서 열린 집회에 발포해 수십명을 학살했다. 봉기를 진압한 후 스탈린주의 관료들은 7명의 “선동자들”을 총살시켰으며 더 많은 수의 가담자들을 감옥에 처넣었다. 소련비밀경찰은 목격자들에게 이 사건을 발설할 경우 장기 징역형에 처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아 이 사건에 대한 모든 정보를 차단시키려했다.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의 사망 후 1980년대 초 잠시 정권을 잡았던 유리 안드로포프는 정권에 저항하는 대중 봉기를 두려워했다고 그의 보좌관 한명이 전했다(M. Ellman 과 V. Kontorovich 공저 The Destruction of the Soviet Economic System을 참조하시오). 1956년 헝가리의 노동자 정치혁명을 진압한 장본인이었던 그는 인민 봉기에 직면할 경우 관료집단의 정권이 위태로울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고르바초프 그리고 부텐코 분파

 

1985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경제를 살리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시장 사회주의” 즉 이윤 생산체제를 도입해야만 소련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의 경제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는 국가기구의 보수적 분자들로부터 상당한 저항을 받았다. 이에 고르바초프는 당의 이데올로기 독점을 철폐하고 모든 정치적 표현을 허용하는 개방정책인 글라스노스트를 시행했다.

 

1988년 후반기에 공식 소련 언론에 맑스주의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논문이 최초로 등장했다. 이제 글라스노스트의 한계가 시험대에 올랐다. 이 논문의 저자는 알렉산드로 지프코였다. 그는 고르바초프의 임기 초반에 그의 연설문 초안을 작성했다. 그는 자랑스럽게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우카 이 지즌(1988-89)] 잡지에 실린 나의 논문들은 공식 이데올로기의 방벽에 도전하는 것으로 널리 인식되었다. 나의 글들은 맑스주의에 대한 공개적인 최초의 도전이었고 백군의 노선에 기초해 있었다…. 1년 전만 하더라도 10월 혁명 70주년을 기념했던 세계 공산주의의 아성인 소련에서 나는 공식 언론에 나름의 견해를 표명했다. 당시 나는 공산당원이었을 뿐 아니라 당중앙위원회 국제부 고문이었다.”

“반공주의자의 형성” Ellman 과 Kontorovich 공저 The Destruction of the Soviet Economic System에서

 

관료집단의 친자본주의 분자들은 점진적으로 우경화의 길을 걸었다. 이에 반해 지프코는 자신이 한평생 주관적 반혁명 분자였다고 주장한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10월 혁명 이전 시대의 책자, 잡지에서 심지어는 1950년대까지 있었던 얼음을 집어 넣는 냉장고 등 가정용품 등에 이르기까지 혁명 이전의 모든 것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가족들이 조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이것들은 과거 좋았던 시절에 대한 나의 신비감과 상상력을 자극했다…. 내전에 대한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언제나 백군을 응원했다. 물론 나는 이 영화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응원한 백군이 언제나 패배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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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후반기에 지프코는 소련공산당의 청년조직이었던 콤소몰의 중앙위원이었다. 그러나 그의 학자로서의 길은 좌초했다. 당 이념가들이 그의 글 가운데에서 이단적인 표현을 발견하고 그의 박사학위 취득을 봉쇄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1983년 고르바초프를 만났을 때 후자는 안드로포프 밑에서 농업부 장관을 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몇 년이 지나 고르바초프의 비서실장 게오르기 스미르노프는 지프코에게 접근하여 그가 고르바초프의 연설물 초안 작성자로 일할 것을 요청했다. 스미르노프는 지프코에게 확신시켰다: 비록 공개 석상에서는 반대로 말하고 있지만 고르바초프는 60년의 “사회주의 건설”이 큰 오류였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지프코는 계속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당연히 고르바초프의 승인을 받은 후 스미르노프는 나에게 자신의 이단적 견해를 고백했다. 서기장이 공식 발언과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떠들고 다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우리의 생각을 공개할 때가 아직도 오지 않았으며 항상 조심하면서 고르바초프를 지지해야 한다고 그가 구태여 나에게 얘기할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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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1월 고르바초프는 지프코를 사회주의국가부의 직책에 앉혔다:

 

“나는 마치 비밀결사조직의 신입회원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고르바초프의 이데올로기적 유연성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러나 1988년 후반부와 1989년 초반기에 [나우카 이 지즌]에 반공주의 논문을 발표한 이유는… 당시 지적인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었으며 진실을 말과 글로 표현할 새로운 기회가 왔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 당시에는 실감하지 못했지만 [나우카 이 지즌]의 1988년 11월호는 당중앙위원회의 이데올로기적 견고성을 테스트했다. 나는 글을 통해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은 약점이거나 낭만주의적 환각일 뿐 아니라 인류와 국가에 대한 커다란 죄악임을 밝혔다. … 우리 사회의 구조는 잘못된 기초 위에 수립되었다. 집단화와 볼세비키주의의 영감을 받은 러시아 민족의 자기 멸망은 맑스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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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는 지프코와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는 분자들이 많았다:

 

“당중앙위원회와 국제부에서 나는 국제관계 모스크바 국립연구소 출신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들은 맑스의 역사 전망이 틀렸으며 사회주의 실험은 모두 헛수고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코민테른 지도자이자 체코공산당 창시자의 아들이었던 고(故) 얀 스메랄은 맑스주의와 단절할 수 없었다. 그를 제외하고 당중앙위원회에서 나를 둘러싸고 있던 인물들은 모두 맑스주의의 운명에 대해 아주 무관심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후에 일어난 사태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즉 페레스트로이카가 큰 혼란을 초래하여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고 이들은 우려했다. 이미 1987년 초에 나는 동료 고문들과 이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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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10월”: 그 진상

 

2000년 9월 영국의 채널 4 테레비 방송국은 발레리 사블린에 대한 얘기를 담은 다큐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사블린은 “라이스 분파”의 일원으로 지프코 일당과는 천적 관계였다. 이 다큐 영화의 제목은 “선상반란: 붉은 10월의 진상”으로 소련의 미사일 구축함 [스토로제보이]호에서 1975년에 발생한 반란을 다루었다. 이 사건은 탐 클랜씨의 1984년 소설 [붉은 10월]의 기초가 되었으며 같은 이름의 영화도 나왔다.

 

클랜씨의 소설에 의하면 러시아의 잠수함 함장 마르코 라이무스는 잠수함의 정치장교가 사망하자 서방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이 소설보다 인기는 떨어졌지만 “진실에 더 가깝다”고 주장되었던 소설은 [붉은 깃발의 선상반란]이다. 이 소설의 저자 앤드루 오루어키는 사블린과 그의 군함의 진짜 이름을 사용했으며 이야기의 배경도 북대서양이 아니라 발트해로 잡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세부 사항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 소설은 클랜씨의 소설만큼 진실과 거리가 멀다. 이 소설의 뒤쪽 커버는 추천광고를 이런 문구로 장식하고 있다:

 

“정부의 폭정과 서방으로 탈출한 애인인 볼쇼이 발레단의 발레리나가 동기로 작용하여 사블린은 자신의 배신적 행위가 가져올 도덕적 정치적 영향을 깊이 계산한 끝에 자신의 군함을 스웨덴의 항구로 향하게 했다.”

 

오루어키와 클랜씨가 뱉어낸 저질 냉전 선전 소설과는 달리 사블린의 행동은 진짜 중대하고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1975년 11월 8일 [스토로제보이]호의 정치장교인 발레리 사블린은 선장을 감금하고 군함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는 서방으로 탈출하기 위해 스웨덴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는 군함을 레닌그라드(지금의 뻬쩨르부르그)로 향하게 했으며 거기서 그는 인민 봉기를 일으켜 부패한 독재권력인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타도하고 진정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고자 했다.

 

러시아 수병들의 혁명 전통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열렬한 맑스주의자 사블린은 1905년 전함 [포템킨]의 선상반란에 특히 감명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소련 해군에 복무했었는데 1955년 16세의 나이에 젊은 사블린은 레닌그라드의 프룬제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곧 이 학교의 콤소몰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의 학급 동료였던 알렉세이 리알린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모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도덕률을 준수하도록 교육받았다. 우리 모두는 이것의 가치를 신봉했다. 그러나 특히 사블린은 고매한 인품을 가지고 있어서 이 이상을 행동으로 옮기고자했다.”

 

맑스주의의 평등주의 이상과 “현실 사회주의”의 엄격한 위계질서와 특권 사이의 간극에 대해 사블린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선상 반란이 있기 전날 밤 사블린은 자기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결정에 대해 설명했다:

 

“나는 왜 이런 행동을 할까? 나는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편안한 부르주아의 삶이 아니라 모든 정직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즐거움을 불어넣는 밝고 진실된 삶을 나는 사랑한다. 나는 확신한다. 58년 전인 1917년과 같이 나라에는 혁명적 의식이 빛을 발하고 우리는 공산주의를 성취할 것이다.”

 

1959년 사관생도의 신분으로 사블린은 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에게 편지를 보내 소련체제의 불평등에 대해 항의했다. 그는 이 분별 없는 행위로 심한 견책을 당했다. 그러나 출중한 장교가 될 자질이 인정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졸업이 허용되었다.

 

사블린은 1969년 30세의 나이에 구축함 함장 자리를 제의받았다. 그러나 그는 고급 이데올로기 연구 과정을 밟기 위해 레닌정치학교에 입학하여 친구들과 가족들을 놀라게 하였다. 당시를 회상하며 그의 동생인 보리스 사블린은 발레리가 관료집단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 체제의 작동 시스템을 알고자 했다고 추측했다. 정치학교에서 맑스, 엥겔스, 레닌을 연구하면서 사블린은 1917년 노동자 혁명이 어떻게 반노동계급적 정치독재체제로 변질되었는지를 해명하고자 했다. 또 다른 동생인 니콜라이는 발레리가 이 정예 정치학교에서도 정보와 책에 대한 접근이 대단히 제한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단히 실망했다고 말했다. 레닌의 [국가와 혁명]에 개진된 사상과 소련의 현실의 엄청난 간극에 주목하고 사블린은 이렇게 결론 내렸다: “이 체제는 내부에서 파괴시켜야한다.”

 

1973년 사블린은 [스토로제보이]호에 배속되어 함장 아나톨리 푸토르니 밑에서 정치장교 및 부함장이 되었다. 정치장교의 임무 가운데 하나는 군함에 배속된 수병과 장교들에게 “맑스주의-레닌주의”를 강의하는 것이었다. 그는 1905년과 1917년 혁명 그리고 이 혁명에서 혁명적 수병들이 맡았던 역할에 대해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강연은 다른 정치장교들의 강연보다 훨씬 더 호평을 받았다.

 

1975년 11월 8일 [스토로제보이]호는 발트해의 항구 리가에 정박해 있었다. 여기서 10월 혁명 기념식이 열렸다.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순간이 바로 이때라고 사블린은 판단했다. 그의 계획은 레닌그라드로 항해하여 거기에서 배의 라디오를 이용하여 민간인 라디오 주파수로 소련공산당에 대한 인민 봉기를 호소하고 새로운 진정한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보다 며칠 전에 사블린은 수병 가운데 샤샤 쉐인을 동지로 만들었다. 이들은 함장을 감금하고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1925년 무성영화 “전함 포템킨”을 상영했다. 영화 관람 중에 그는 자신의 계획을 16명의 장교들에게 설명하고 이들의 지지를 구했다. 놀랍게도 이들 중 8명이 목숨을 걸겠다고 나섰다. 쉐인의 뒤를 따라 수병들은 모두 반란에 나섰다.

 

한편 반란에 반대한 하급장교 가운데 하나가 배가 리가에 정박 중일 때 탈출하여 곧장 당국에 반란 계획을 고발했다. 이 시점에서 사블린은 반란을 포기할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수병들이 끝까지 반란을 결행할 것을 주장하여 11월 9일 오전 10시에 군함은 레닌그라드로 향했다.

 

사블린은 레닌그라드에 도착하기 전에 소련의 노동계급에게 라디오 방송으로 봉기를 호소하기로 결심했다. 불행하게도 봉기에 반대한 함정의 라디오 요원이 사블린의 연설을 암호로 방송하여 해군 수뇌부만이 들을 수 있게 만들었다.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는 한밤중에 잠자리에서 깨어나 반란을 보고 받았다. 그는 군함을 나포하거나 필요하면 침몰시킬 것을 명령했다. 63대의 비행기와 13척의 군함이 반란 군함을 찾기 위해 출동했다. 소련비밀경찰은 처음에는 노동자에 대한 방송이 속임수일 것이며 군함이 진짜 향하고 있는 곳은 스웨덴일 것으로 생각했다. 동이 틀 무렵 소련의 해안경비정이 반란 군함을 발견했다. 비밀경찰은 즉시 군함이 멈추면 사면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사블린은 이 제의를 거부했다. 또한 자신들은 배신자가 아니며 서방으로 탈출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스토로제보이]호에 맨 먼저 도달한 발트해 함대 소속 비행기들은 군함에 대한 발사명령을 거부했다. 이에 국방장관 안드레이 그레츠코는 노발대발하고 즉시 명령을 이행할 것을 지시했다. 그레츠코는 1953년 동독 노동자들의 봉기 진압 당시 소련군 지휘관이었다. 두 번째 출격한 비행기들은 폭탄을 군함에 떨어뜨려 선체에 손상을 가했다. 군함은 기동력을 상실하고 정지했다.

 

이때 지그가 올라간 것을 알아챈 일부 수병들이 함장 푸토르니를 풀어주었다. 함장은 곧바로 함교로 달려가 권총을 사블린의 다리에 발사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는 당국에게 군함이 자신의 통제하에 들어왔음을 알렸다. 비밀경찰 요원들과 공수부대원이 군함에 올라가는 것으로 반란은 시작 6시간만에 끝이 났다.

 

리가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반란군을 경비하던 공수부대 장교가 쉐인에게 물었다: “왜 이런 짓을 했는가? 너희들은 군인 서약을 어겼다.” 이에 대해 쉐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사는 꼴을 보라! 이것이 제대로 된 삶인가? 인민이 정말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지배층이 하는 말은 거대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이 장교는 이에 대답을 하지 못했으나 쉐인은 그가 자신의 말에 동의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스토로제보이]호가 리가에 도착하자 비밀경찰은 반란에 반대한 장교들을 포함해 이 군함의 수병과 장교 모두를 체포했다. 당국은 이 극적인 사건에 대한 소식을 차단하려고 애썼으나 이미 “제 2의 전함 포템킨”에 대한 소문은 리가에 퍼지고 있었다. 실패하기는 했으나 “공산”당에 대한 사회주의 반란 소식이 가져올 정치적 위험성이 두려워 비밀경찰은 군함이 스웨덴으로 탈출을 기도했다는 거짓정보를 유출시켰다. 이 거짓정보는 곧 서방의 정보기관들에 의해 포착되어 클랜씨의 소설의 기초가 되었다. 사블린, 쉐인 그리고 14명의 반란 가담자들은 비밀경찰의 가혹한 심문을 받았다. 비밀경찰은 이 반란의 배후에 있을 것으로 판단된 비밀조직을 색출하는데 주로 관심을 쏟았다.

 

사블린은 9개월간 매일 심문을 받았다. 결국 그는 “조국 배반죄”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보통 이런 기소 내용은 15년 징역형을 받게 되어 있으나 브레즈네프는 개인적으로 개입하여 사블린의 처형을 요구했다. 쉐인은 8년 징역형을 언도 받았다.

 

 

발레리 사블린: 노동계급의 영웅

 

사블린을 처형하는데 만족하지 못한 소련의 관료집단은 그를 친제국주의 배신자로 비방하여 그의 이름을 더럽혔다. 러시아 역사학자 미콜라이 체르카쉰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 술책은 당국에게는 아주 편리했다. 사블린의 이름이 더럽혀지고 그를 잡범으로 처리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또는 금전적인 문제로 서방으로 탈출을 기도한 자로 몰면 되었다. 이러한 술수들은 이 사건의 의의를 축소시켰기 때문에 편리했다. 그의 행위는 반란이나 봉기가 아니라 단순히 범죄에 불과했다고 말하면 되었다.”

 

미국 영화계가 숀 카널리 주연의 영화 [붉은 10월]을 출시했던 1990년이 되어서야 러시아의 인민은 이 사건의 진상을 알게되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영화 거물들은 반란의 진상을 밝히는데에는 브레즈네프만큼이나 관심이 없었다.

 

발레리 사블린의 행동은 대단한 용기와 혁명 의지를 필요로 했다. 스탈린주의 경찰조직이 소련의 지하 혁명조직을 색출하는데 엄청난 자원을 투여하고 있다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던 사블린은 기습 공격이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생각했다.

 

수년간 품어온 사블린의 결의는 오늘날 혁명가들을 감명 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스토로제보이]호의 반란은 아무리 영웅적이었어도 개인적 행위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함께 행동할 중핵이 형성되지 않았고 스탈린주의 체제에 반대한 볼세비키-레닌주의 이전 세대들의 투쟁과 연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블린의 고립된 행위는 처음부터 실패가 거의 예정되어 있었다. 일상적 행위와 사고의 습관이 이미 흔들린 일반화된 정치위기의 상황에서만 이런 종류의 개인적 행위는 보다 광범위한 투쟁의 물결을 촉발시킬 수 있다.

 

보리스 옐친의 승리로 끝난 스탈린주의 “강경파”의 1991년 8월 쿠데타는 정치위기의 상황에서 터진 기습공격의 한 예이다. 이 사건의 교훈을 당시 우리는 이렇게 표현했다:

 

“허약하고 동요하던 쿠데타 음모자들이 옐친의 오합지졸 지지자들과 대치하고 있었을 때 상대적으로 아주 소규모의 혁명 그룹이 개입했어도 사태를 결정하는데 큰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집단적 소유체제를 노동자 권력의 민주적 기관으로 보존시키는데 헌신하는 트로츠키 그룹에게 양측 모두가 보인 허약성과 혼란은 하나의 기회였다. 러시아 의사당 내부와 주변에 모여있던 백명 정도의 가볍게 무장한 옐친 지지자들을 공격하여 이들을 해산시키는 것이 당시 쿠데타 첫 며칠간의 전술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반혁명 세력에 대한 결의에 찬 공격은 페레스트로이카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노동계급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또한 이 공격은 군대의 상당 부위의 공감을 받아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부위의 적극적 지지를 추동시켰을 것이다. 쿠데타를 일으키고 허둥지둥하던 스탈린주의자들은 이 ‘지원’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노동자 권력의 이름으로 시작된 이 지원은 결국 쿠데타 세력들을 쓸어버렸을 것이다. 먼저 옐친의 반혁명 오합지졸을 해산시킨 후 모든 공장, 병영, 노동계급 주거지구의 대표들을 러시아 의사당에 결집시켜 진짜 민주적인 모스크바 소비에트를 수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17년] 제 11호

 

1991년 8월 19일 세르게이 예브도키모프 소령은 쿠데타 주동자들의 명령을 받아 옐친의 반혁명 본부 앞에 10대의 탱크를 출동시켰다. 그의 일화는 주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결정적 순간에 개인의 결정에 따라 운명을 달리 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옐친의 지지자들은 그에게 러시아연방의 대통령 옐친을 제거하라고 명령이 떨어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명령에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에 둘러싸여 3시간 동안 설득을 당한 그는 옐친이 쿠데타 직후 국방장관으로 임명한 코베츠 장군 그리고 아프간 전쟁 영웅이었던 러시아연방의 부통령 루츠코이를 만났다. 그리고 이들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탱크를 반대편으로 돌리겠다고 결정한 예브도키모프 소령의 판단은 쿠데타 세력의 패배를 결정했다. 그의 행동은 옐친 지지자들을 고무시켰고 대신 “비상위원회”의 쿠데타 지도자들을 낙담에 빠뜨렸다.

 

옐친 지지세력의 핵심을 구성한 야바위꾼들과 암시장 모리배들은 이후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직업군인이었던 예브도키모프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상관이 나에게 “자네는 곧 국방장관이 될거야,”라고 말했을 때 나는 문제가 커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때부터 나의 직업군인 경력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상관들의 질책을 몇 달간 받은 후 예브도키모프 소령은 전근을 요청했다. 그러나 승진은 뒤따르지 않았다.”

[터론토 스타]지, 2001년 8월 14일

 

현재 예브도키모프는 실업자 신세이다. 그러나 반혁명에 의해 고통을 당한 수천만 인민과는 달리 그는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판 장본인이었다. 장교들이 반혁명의 “영웅”이었던 그를 차갑게 맞이한 사실은 소련군 내부의 상당수가 옐친을 공격한 진지한 군사행동이 일어났다면 이것에 공감했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단 한 척의 군함이나 단 하나의 연대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지지 반란은 노동자 정치혁명을 촉발시켜 옐친의 자본주의 복귀 세력이나 스탈린주의 관료 도둑놈들을 전부 일망타진시켰을 것이다.

 

발레리 사블린은 트로츠키가 말한 바 관료집단 내부의 “라이스 분파”의 한 예였다. 사블린을 친자본주의 배반자라고 매도했던 스탈린주의 관료들은 이미 반혁명과 타협한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발레리 사블린의 이름은 혁명가들의 기억 속에 사회주의 미래를 위해 투쟁한 용감하고 순결한 투사로 기리 남아있을 것이다.

 

[스토로제보이]호의 반란 25주년을 기념하여 모인 자리에서 샤샤 쉐인은 이렇게 말했다: “어느 사회든지 고귀한 인물이 필요하다. 이들이 없다면 사회가 발전할 수 있겠는가. 사블린은 이러한 고귀한 인물의 하나였다.” 사블린의 고귀한 정신은 그가 처형되기 전 아들에게 보내도록 허용된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역사는 사건들을 정직하게 판단할 것이다. 너는 아버지가 한 행위에 대해 결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 점을 굳게 믿어라. 비판을 하면서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자들이 결코 되지 말아라. 이런 사람들은 위선자들이다.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변화시킬 능력이 없는 나약하게 쓸모 없는 인간들이다. 아들아, 용기를 가져라. 삶이 멋진 것이라는 믿음 속에 강한 인간이 되어라. 항상 긍정적으로 만사를 보고 혁명이 언젠가는 승리한다는 신념을 갖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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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련 중국 북한 등 노동자국가들의 사회성격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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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와 ‘국가와 혁명’: 국가자본주의론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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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IBT) 남한의 구속된 사회주의자들을 모두 석방하라!(15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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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IBT) 소련에서 반혁명이 승리하다(11호,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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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IBT) 죽음의 고통에 처한 스탈린주의: 동유럽 국가의 몰락과 클리프파의 정치적 오도(8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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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IBT) 소련의 사회성격에 대하여(6호,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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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IBT) 중국은 어디로? : 정치혁명과 반혁명의 갈림길(31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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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중국 사회성격에 대한 메모: 중국은 이미 자본주의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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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IBT) 붕괴의 벼랑으로 향하는 중국(26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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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IBT) 소련의 관료지배층은 계급이 아니었다(24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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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IBT) 러시아: 자본주의 생지옥(24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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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IBT) 소련은 왜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가?

    Date2015.03.26 Category노동자국가(소련/중국/북한 등)의 사회성격 By볼셰비키 Views7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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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소련 붕괴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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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소련 붕괴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 청중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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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IBT) 1989년 사태 25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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