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국가(소련/중국/북한 등)의 사회성격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와 ‘국가와 혁명’: 국가자본주의론 비판

by 볼셰비키-레닌주의자 posted Dec 24,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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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부르주아 사회주의와 ‘국가와 혁명’

: 국가자본주의론 비판



차례

1. 이 시대의 ‘국가와 혁명’

2. 국가자본주의론의 정치적 본질

3. 노동자권력과 사적소유 철폐 문제

4. 토니 클리프와 [소련 국가자본주의]

5. 이 시대의 ‘국가와 혁명’과 노동계급의 과제



현실을 직시하고, 최소 저항선을 찾지 않으며, 사물의 이름을 올바르게 부르며, 아무리 쓰디쓴 진실도 대중에게 있는 그대로 말하며, 난관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큰일뿐 아니라 작은 일에도 충실하며, 강령을 계급투쟁의 논리에 일치시키며, 행동으로 떨쳐 일어날 시간이 왔을 때 대담성을 발휘하는 것, 이것이 제 4 인터내셔널의 규율이다.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과 제4인터내셔널의 임무(이행강령)> 중에서

※특별한 설명이 없는 강조는 작성자. [ ] 안의 내용은 작성자


1. 이 시대의 ‘국가와 혁명’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는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와의 투쟁의 역사이다”

제 4인터내셔널의 창립문서로 트로츠키가 제출한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과 제4인터내셔널의 임무(이행강령)>는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에 쓰인 문서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혁명과학이 그러하듯이, 트로츠키 당대의 “사회주의 혁명의 객관적 조건”은 이 시대에 여전하고, 지금 역시 혁명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가장 주요한 장애물은, 대자본가에게 겁먹는 소자본가의 비겁을 드러내며,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 한가운데에서 대자본가와 유착하는 노동계급 지도부의 기회주의”이다. “기회주의와 무원칙한 수정주의에 대한 투쟁”이란 장에서 트로츠키는, 혁명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동계급이 그 실체를 폭로하고 극복해내어야 할 기회주의와 수정주의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오랫동안 세계 노동계급이 당한 비극적 패배들은 기존 노동자 조직들을 더욱 보수화시켰다. 이 현상은 동시에 완전히 기가 죽은 소자본가 ‘혁명분자’들이 ‘새로운 길’을 찾게 만들었다. 반동과 부패의 시기에는 늘 그렇듯이 사기꾼들과 약장수들이 모든 곳에서 등장한다. 이들은 혁명 사상의 모든 맥락을 수정하려한다. 과거로부터 교훈을 찾는 대신 이들은 과거를 ‘거부한다’. 어떤 자들은 맑스주의의 일관성 결여를 발견한다. 또 어떤 자들은 볼셰비키주의의 몰락을 선언한다. 혁명 사상을 배신한 자들의 오류와 범죄행위를 혁명 사상의 잘못이라고 이들은 주장한다. 그리고 또 어떤 자들은 혁명 사상이 즉시 기적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비난한다. 더욱 대담한 자들은 만병통치약을 발견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계급투쟁을 중지하고 기다릴 것을 권장한다. ‘새로운 도덕률’을 선전하는 수많은 예언자들은 도덕률로 노동운동을 부활시키려한다. 그러나 이들 대다수는 싸움터에 나서기도 전에 이미 스스로를 도덕적인 병자로 만들었을 뿐이다. 이 결과 공상적 사회주의의 서적창고에서 썩고 있던 낡은 처방들이 ‘새로운 길’이라는 이름으로 노동계급에게 제시되고 있다.”–<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과 제4인터내셔널의 임무(이행강령)>, 1938

만약 여러분들이 우리 정치판을 맑스-레닌-트로츠키주의 관점에서 예민하게 관찰해 왔다면, 각 구절들을 읽으면서, 위 글이 지적하는 기회주의 수정주의와 구체적으로 대응되는 닮은꼴을 남한 노동계급 정치에서 즉각 유추해낼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완전히 기가 꺾인 소부르주아 기회주의자들”이 누구인지, “사기꾼과 약장수들”은 남한에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는지, 어떻게 그들이 “혁명 사상의 맥락을 수정”하려 드는지, 혁명사상을 배신한 자신들의 잘못을 “혁명 사상 자체의 잘못”이라고 어떻게 호도하려 드는지, 어떤 이들이 대단히 낡은 부르주아적 도덕률을 “새로운 도덕률”이라는 이름을 씌워서 노동운동을 재편하려 드는지.

현재 남한에서 이러한 모습들은 크게, 노동자주의(조합주의 또는 경제주의) 국가자본주의 스탈린주의 페미니즘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시대와 국가와 혁명

<국가와 혁명>은 레닌의 저작들 중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노작 중 하나이다. 카우츠키로 대표되는, 국가에 대한 기회주의적 수정을 폭로하고 마르크스 엥겔스의 사회주의적 국가관을 옹호하는 이 저작은 1917년 8-9월 사이에 쓰였다. 1917년 8, 9월이 어떤 시기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10월 혁명이라는 20세기 역사상 가장 거대한 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한두 달 전이고, 계급투쟁이 그 정점을 향하여 가파르게 치닫던 때이다. 부르주아 정권의 검거령을 피해 핀란드로 간신히 몸을 피한 레닌이 집필한 것은 ‘봉기의 기예’ 같은 주제가 아니었다. ‘국가와 혁명’이라는 어찌 보면 당시의 긴박한 상황과 동떨어진(?) 추상적(?)이거나 한가(?)해 보이는 주제였다. 혹시 레닌은 당시의 혁명 상황을 비관하여, 당대의 혁명이 아니라 먼 미래 혁명의 후배들을 위해 이 주제를 집필한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레닌이 <국가와 혁명>을 집필한 것은 러시아 혁명의 실제적 필요에 복무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카우츠키 그리고 그의 러시아 제자들인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등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은 2월 혁명으로 상승한 노동계급의 투쟁과 정치의식을 그들의 기회주의적 국가관으로 희석시키고 좀먹고 있었다. 임시정부에 참여하거나 그것을 지지하는 것을 통해 혁명을 원점으로 되돌리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기회주의적 국가관이 있었다. 러시아 노동계급이 혁명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회주의적 국가관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레닌은 절실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즉, 부르주아 국가의 개량이 아니라 그 파괴를 통해서만 노동자 국가를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을 논증하고, ‘부르주아 국가의 개량으로도 점차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기회주의적 환상을 깨부숴야만, 비로소 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레닌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닌의 말처럼 “ [국가문제]는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정치적 논쟁들의 근본 문제(<국가에 대하여>)”이고, 국가론의 왜곡은 부르주아의 압력에 짓눌린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의 비겁한 이론적 퇴행으로 인한 기회주의이며, 기회주의 국가관으로의 사상적 굴복은 혁명에 대한 배신과 그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1917년 레닌의 <국가와 혁명>은 카우츠키, 멘셰비키, 사회혁명당 등 그 당시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의 수정주의 국가론이라는 사상적 독초를 뿌리 뽑기 위한 필수적 작업이었다.

그리고 지금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의 국가론 수정은 국가자본주의론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역사적 사실을 왜곡, 외면하는 국가자본주의론이라는 궤변

객관적 사실과 과학의 논박을 피해가는 효과적 방법 중 하나는 논박 당하거나 폭로된 기존 이론과 자신의 이론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10월 혁명 성과 방어를 부정하는 것을 본질로 하는 국가자본주의론은 기존 이론의 약발이 다할 때마다, 저마다 이전 것과의 차별성을 주장하며 나름의 ‘이론’을 발명해 내었다. 그리고는 카우츠키, 멘셰비키, 사회혁명당 등 소부르주아 사회주의가 늘상 그러하듯, 마르크스주의를 그 위에 잔뜩 덧칠한다.

그런데 저마다의 개성들을 주장하지만, 핵심은 거의 같다. 즉, ‘소련 중국 북한 쿠바 베트남 등은 집단소유체제(또는 국가소유체제) 위에 수립된 나라이다. 그러나 노동자 민주주의가 확립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집단소유체제 위에 군림하고 있는 관료는 사회의 기생 ‘계층’이 아니라, ‘자본가 계급’이다. 그러므로 그 국가들은 사회주의도 노동자국가도 아니며 자본주의국가들이다. 그러므로 방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민주적이지 않으면, 설령 사적소유가 철폐되어도 자본주의’라는 그들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괴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자본가들과의 내전을 치러서 ‘자본가’ 들은 자본주의적 소유형태를 철폐했다. 그리고 그 위에 ‘자본주의’ 국가를 수립했다.’

토니 클리프나 사노련 등에 따르면, 소련 에는 1920년대 후반 즈음(국가자본주의론자들은 그들마다 소위 자본주의 반혁명이 나타난 시기 규정이 다들 다르다. 그리고 뒤에 언급하겠지만 ‘달라야’ 한다.)에 ‘자본주의’ 반혁명이 있었다. ‘관료자본가’들은 부하린의 시장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으로 인해 쿨락 등 신흥 자본가들이 성장하자 30년대에 거의 내전에 가까운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강제 집산화를 단행해야 했다. 토니 클리프와 그 후배들에 따르면, ‘소련에는 그렇게 자본가 세력을 제압하고, 자본주의의 토대인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철폐하고 ‘자본주의’ 국가가 수립되었다.‘ ‘자본주의’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또는 수립하는 과정에서 왜 자본주의 국가가 타도되고 자본가 그리고 제국주의자들과 전쟁을 치르고 사적소유는 철폐되어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온데간데없다. 막무가내다.

북한 은 어떠한가? 2차 대전 막바지, 당시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소련군이 북한지역을 점령했다. 당시 스탈린집단의 대외정책은 자본가 지주 세력과 함께하는 계급동맹 즉, 인민전선이었다. 그리하여 통일전선이라는 이름으로 북한지역에서 자본가와 지주에 대한 유화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자신들을 보호해 줄 국가권력의 부재로 인해 위협을 느낀 지주와 자본가들은 대거 남한으로 넘어오게 된다. 대부분의 중요 생산수단들은 이 때 국유화되었고 토지는 농민들에게 무상분배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초토화된 농토와 산업 등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사적소유는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사노신 등을 포함한 국가자본주의론자들에 따르면, 이렇게 자본가들이 탈출하고 자본주의적 소유인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가 철폐된 땅에 수립된 국가는 ‘자본주의’ 국가이다.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1949년 최종 승리하였다. 중국공산당을 중심으로 노동자·농민·지식계급·애국적 자본가의 단결을 상징하는 오성홍기가 상징하는 것처럼, 모택동의 신민주주의 노선은 스탈린주의 인민전선정책이었다. 하지만, 중국 자본가들은 북한에서와 마찬가지로 장개석의 국민당과 더불어 대만으로 도망간다. 주인을 잃은 생산수단은 국가소유가 되었으며, 소련의 체제를 그대로 이식한 스탈린주의 국가가 수립되었다. 사노련 등을 포함한 국가자본주의론자들에 따르면, 이 나라도 ‘자본주의’ 국가이다. 자본가들은 ‘자본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마당에 왜 자리를 피해야 했는지, 왜 부르주아적 소유를 철폐하여 ‘부르주아’ 국가를 수립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은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한다.

쿠바 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카스트로를 중심으로 한 농민의 지지를 받는 게릴라들은 애초에 자본주의국가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쿠바 인민을 경제 정치적으로 억압하는 미제국주의의 꼭두각시 정권을 타도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권력을 잃은 쿠바의 매판자본가들은 미국의 도움 아래 플로리다로 도망갔고, 미제는 카스트로 정권에 대해 적대정책을 펼쳤다. 생산수단의 주인은 사라졌다. 그리하여 소련에 의지한 카스트로 정권에 의해 생산수단은 자연스럽게 국가소유가 되었고 스탈린주의 체제가 이식되었다.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은 이 경우에도 왜 ‘자본주의’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자본가들이 도망쳐야 했는지, 왜 자본주의의 토대가 되는 사적소유가 철폐되어야 하는지는 끝내 외면한다.

그리고는 외친다. ‘생산수단의 국가소유 따위는 사회주의에 있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소부르주아의 ‘정치적 태도’로서의 국가자본주의론

도대체 왜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은 그 스스로 자가당착을 잔뜩 안고 있는 비논리이며, 사실관계와도 부합되지 않는 얼토당토않은 궤변을 소위 ‘이론’이랍시고 내어놓는 것일까? 그리고 그 ‘이론’이 맞다면, 왜 소위 그 ‘이론’들은 기존의 전통에 기초하지 않고, 자기 선배들의 이론적 작업을 하나같이 부인하면서 새로운 것임을 주장하는 것일까? 왜 그들은 자기 선배들의 이론적 전통은 부인한 채, 전혀 다른 결론을 도출해 내는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의 이름을 빌리려 하는 것일까?

그 까닭은 국가자본주의론은 인류 실천의 총화에 기초한 이론이 아니라, 특정계급의 정치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 정치적 굴복을 숨기기 위해, 마르크스라는 외피를 입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과학적 이론 은 인류의 역사적 실천 위에 기초하고, 그 계승자는 그 전통 위에 자신을 정립시킨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국가론은 프랑스혁명이라는 거대한 실험을 거치며 구체적인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레닌은 그 이후의 역사적 실천 즉,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나타난 카우츠키 멘셰비키 등의 기회주의와의 투쟁을 거치며 그 내용을 풍부하게 하였다. 트로츠키는 소련에서 일어난 스탈린주의 관료화와 노동자혁명으로 수립된 국가 체제를 관료집단이 장악하는 것을 목도하였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와 레닌의 성과에 기초하여 그 국가 형태를 분석해 내었다.

하지만, 특정계급(이 경우에는 소부르주아)은 역사적 실천의 총화 그리고 그 연속성으로서의 전통과 무관하게, 특정한 역사적 시기와 특정한 사회조건 속에서 자신의 독립된 이해관계를 갖는다. 자신들의 정치적 위치와 그에 대한 대응에서 나오는 정치적 태도 (이론이 아니라)는 같은 계급의 이전의 태도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따라서 과거의 전통에 기초해야할 필요가 없으며 그것을 계승해야 할 이유도 없다. 바로 이 점이 국가자본주의라는 정치적 태도가 그 시대의 소부르주아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갱신되며, 갱신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자의 경우 자신의 정치적 굴복을 숨기기 위해 과거의 정치적 굴복과 단절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 하면, 그 선배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자는 역사적 실천 속에서 배신자임이 명백하게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굴복을 감추기 위해 그들은 이미 폭로된 선배와의 연관을 부인하고, 대신 애꿎은 마르크스나 레닌 트로츠키를 내세우고 그들의 등 뒤에 숨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카우츠키를 섁트먼이 부정하고, 그 둘을 토니 클리프가 다시 부정하며, 또 다시 우리의 사노련이나 사노신 등이 토니 클리프를 부정하며 자신의 국가자본주의론을 주장하는 이유이다.

사회적 조건으로 인해 유일하게 그리고 끝까지 혁명을 완수할 계급인 노동계급의 경우, 자신의 진보성을 실현하기 위해 과학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하지만, 일정부분 진보적이나 어느 지점에서 기존의 체제와 이해를 같이 하는 소부르주아는, 마르크스주의라는 과학을 어느 정도까지 수용하다가, 자신의 정치적 이해와 갈라지는 그 지점에서부터 과학의 수용을 멈추고, 자신과 다른 부분을 자신의 소부르주아적 입장에 맞게 ‘수정’하기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각각의 국가자본주의론의 오류를 과학적으로 논증하여, 국가자본주의론을 주장하는 자들을 설득하고 그들에게 노동계급의 대의를 위해 끝까지 복무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망한 일이며 그다지 생산적이지도 않다. 왜냐 하면 그들은 과학의 전통에 기초하고 과학적 추론에 입각하여 그러한 이론적 결론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태도를 먼저 결정하고 그것을 숨기고 합리화하기 위해 이론인 양 포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무서운 일이지만, 국가자본주의론은 기존 노동자국가들이 소련처럼 모두 반혁명으로 전복될 때까지 새로운 상표를 달고 신상품으로 끊임없이 생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무지로 인해 환자의 병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한 의사가 있다면, 그 의사는 그 무지를 개선하기 위해 재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불가항력적 무지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고의로 오진한 경우라면 사정이 다르다. 적어도 재교육 실시는 이 경우엔 제대로 된 대응이 아니다.

스탈린주의로 퇴보한 소련의 성격을 분석해낸 제4인터내셔널의 지도자 트로츠키가 남한에 알려진 것은 다함께로 알려진 토니 클리프주의보다 뒤의 일이다. 트로츠키주의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퇴보한 노동자국가 소련방어노선이다. 토니 클리프주의는 그 핵심노선을 폐기하며 등장한 정치조류이다. 그랬으면서도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트로츠키주의로 포장하여 1990년대 초반 남한에 수입되었고, 지금까지 남한 사회주의자들을 혼란시키고 있다. 토니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배반당한 혁명> 등, 스탈린주의 노동자국가의 성격을 분석하고 10월 혁명 성과 방어와 정치혁명을 주장하는, 트로츠키 저작들은 국제볼셰비키그룹(IBT)에 의해 1995년 이후부터 비로소 번역 소개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2009년이다. 그 동안 국가자본주의론의 허구성을 밝히는 트로츠키 자신의 글들과 트로츠키주의에 입각한 논문들이 보다 더 풍부하게 소개되었음에도, 그것에 대한 명확한 논박 없이 국가자본주의론을 고수하는 것은 단순히 무지의 문제가 아니다.

 

2. 국가자본주의론의 정치적 본질

트로츠키에 의해, 심지어 그의 죽음 이후에 등장하는 국가자본주의를 포함하여 거의 모든 국가자본주의는 논박되었다. 그런 점에서 더 보탤 것이 없다. 국가자본주의론의 허구성을 알고자 하는 진지한 동지들에게는 <배반당한 혁명>, <맑시즘을 옹호하며> 등 트로츠키의 저작을 직접 읽을 것을 진심으로 권한다.

다만 여기서 나는, 국가자본주의론은 과학적 이론이 아니며, 제국주의와 자국 자본가 국가의 압력에 굴복하여 10월 혁명과 그 연장된 성과 방어를 포기하는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태도일 뿐이라는 것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제국주의와 자본가 권력에 대한 이론적 굴복으로서의 국가자본주의론

국가자본주의론의 원조는 카우츠키 였다. 이미 1919년에 카우츠키는 레닌 당시의 소련을 관료들로 구성된 “새로운 계급”이 지배하는 “국가자본주의 체제”라고 선언했다. 카우츠키의 부르주아에 대한 정치적 굴복은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혹시나 카우츠키는 너무 낡아서(?) 지금의 국가자본주의론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며 자위할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므로, 자신들의 국가자본주의론과 비교해 보라고 카우츠키를 몇 구절 인용한다.

“따라서 산업을 구축하기 위해 관료들의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어 노동자들을 지배해야했다. 이 새로운 계급은 모든 실질적인 통제력을 장악한 후 노동자들의 자유를 단순히 환상에서만 존재하는 자유로 변모시켰다.……현재 국가와 자본가의 관료집단은 하나의 체제로 통합되었다 . 이것은 볼셰비키당이 초래한 거대한 사회주의 격동의 최종적 결과이다. 이 체제는 지금까지 러시아가 겪었던 모든 형태의 전제 가운데 가장 억압적이다 .…… 노동계급 독재의 핵심 특징은 노동 대중에 의한 정부의 민주적 통제이다 .”–<소련은 왜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가?>에서 재인용

밑줄 그은 문장들에서 보다시피, 낡은 카우츠키의 국가자본주의론에도 2009년 최신판 국가자본주의론의 핵심 레퍼토리는 다 들어 있다. 스탈린주의를 핑계대며 자신들의 국가자본주의를 두둔하는 자들은, 카우츠키가 1919년에 2009년과 비슷한 레퍼토리로 연주하는 이 곡이 스탈린이 아니라 레닌을 향한 것이었다는 것도 잊지 말기를 바란다.

1930년대 말 2차 대전이 시작되던 무렵 계급투쟁은 세계적 차원에서 고조되었다. 그러자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의 소부르주아 분파인 섁트먼과 버넘 등은 소련을 관료적 집산주의 체제라고 규정하고 소련 방어 노선을 폐기할 것을 주장하며, 대규모의 탈당을 조직하였다. 그 후 대부분은 우익으로 빠르게 전향하였다.

토니 클리프 그룹은 한국에서 냉전이 열전으로 전환되어 가고 있던 바로 1950년대 초반에 트로츠키주의 운동으로부터 이탈하여 나갔다. 1950년 한국전쟁이 소련 “제국주의”와 미제국주의 사이에 벌어진 “대리전쟁”이라고 규정하고 그 어느 편도 들지 말 것을 주장하며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소비에트 블록을 방어하는 그 불편한 임무로부터 스스로를 면제했다. 이 부분을 <남한 국제사회주의자(IS)에게 보내는 편지-무엇이 올바른 길인가?>에서 조금 인용해 보자.

“소련을 “제국주의”라고 규정하는 관점이 비과학적 반(反)맑스주의적임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한국전쟁이 “대리전쟁”이라는 주장은 사실과 무관한 것입니다. 비록 북한이 소련과 중국의 영향력 아래에서 김일성과 같은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지도받고 있었지만,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토대로 한 토지개혁 및 기간산업의 국유화를 골자로 하는 사회혁명이 북한 민중들에게 광범한 지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개혁 정책이 남한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끼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도 남한에서 북한을 옹호하는 좌익세력들에 의해 여러 번의 봉기 시도가 있었음을 우리는 제주도 5.10 선거 반대 봉기나 여순 군대봉기와 같은 예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제주도 민중들의 ’4.3′ 봉기를 계기로 하여 전개된 무장유격투쟁은 한국전쟁 기간 동안 그리고 그 전후로도 지리산, 오대산, 태백산 등지에 근거지를 두고 활발하게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한국전쟁이 단순한 대리전이 아니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증명해 줍니다.”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은 묵묵부답이다. 자신들의 정치적 굴복을 감추는 데 여념이 없어, 역사적 현실을 묵묵히 외면한다.

스스로는 카우츠키 이래의 전통을 부정해보려 하지만, 내용적으로 그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정치조직은, 다함께와 더불어 사노신, 사노련, 해방연대 등 이다. 2006년 북한이 핵실험을 했을 때 그들은 하나같이 양비론을 구사하며 북한 핵실험을 규탄했다.

지난 4월 북한이 인공위성이라고 말한 로켓발사를 했을 때, 자본주의 언론들과 더불어 사노련이 그에 반대한 것은 물론이다. 4월 16일 사노련이 발표한 <[북한 로켓발사] 제국주의 전쟁반대! 노동자 국제주의 실현!>이라는 성명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을 향한 긴장격화’란 소제목에 이어 “북한이 제국주의 국가는 아니지만, 강성대국을 추구하는 자본가 국가로서 제국주의 세계체제에서 지위를 보장받기 위해”라는 아리송한 말로 북한을 제국주의 반열에 은근슬쩍 올려놓는다. 노동자국가 방어 임무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1950년 당시의 소련을 ‘제국주의’로 승격시킨 토니 클리프와 솜씨가 비슷하다. 그러면서 “우리는 단지 반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각국 노동자계급의 국제연대를 강화하고, 나아가 제국주의 전쟁을 자국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내전으로 전화시키는 노동자 국제주의 실현의 방향으로 전진해야 한다고 본다.”라며 좌익적 언사로 포장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미제의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침공 시 그 “국제연대”는 침략을 막아내었는가? 러시아혁명 이후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내전을 그 “국제연대”로 막아내었는가? 미제의 침략에 맞선 이란의 핵무기 개발에 대해 우리는 그것을 반대해야 하는가?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우리는, 설령 노동자국가가 아니더라도, 식민지국가에 대한 제국주의자들의 모든 침탈에 반대한다. 핵무기를 포함해 제국주의자들의 테러행위와 침탈에 맞선 모든 자위수단을 지지한다.

사노련의 북한 혐오증은 유명하다. 그들은 기관지 <가자! 노동해방> 14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북한 김정일의 사망, 그리고 북한의 관료적 지배체제의 붕괴에 대해 우리가 슬퍼해야 할 이유가 없다. 무너져도 빨리 무너져야 할 반동 체제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중략) 나아가서 이런 상황에서는 북한 노동자 민중은 ‘미제 축출’을 내건 북한 관료집단의 영향력에 다시 포섭될지도 모른다. 남한에서도 계엄령을 비롯한 살벌한 반동 조치들이 활개 치면서 노동자 민중의 수십 년의 투쟁 성과들을 무로 돌리려 할 것이다.”–북한 김정일 체제의 위기-부시와 이명박의 야합에 맞서야 한다!

북한 혐오증이 너무 심한 나머지, 그들은 북한이 “무너져도 빨리 무너져야 할 반동 체제”이며,‘미제 축출’이라는 구호는 북한 관료집단의 구호일 뿐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들의 소위 ‘이론’은 제국주의와 자본가권력에 의한 자신들의 굴복을 치장하기 위한 알리바이이다.

 

소부르주아의 동요를 반영한 정치적 태도로서의 국가자본주의론

자본주의 모순이 심화되어 감에 따라 극소수는 대부르주아 사회로 편입되고 대다수는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하는 소부르주아는, 대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경계에 존재한다. 그리고 양쪽에서 오는 정치적 압력을 모두 받으며 동요한다. 그때그때의 역관계에 따라 때로는 대부르주아에 이끌리고 때로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이끌리면서, 양쪽 모두에 의존하며 동시에 양쪽 모두를 의심하고 경계한다.

그들 역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심각하게 겪고 있다. 소외 비인간화 등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더불어 사회경제적으로 끊임없이 추락하는 위기의식은 그들을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나아가게 한다. 일부가 정치적으로 전진하며 사회주의 혁명운동에 편입된다. 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누리는 알량한 특권에 대한 애착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새 사회에서도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지위를 온전히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구 사회를 철폐하고 새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우여곡절들 즉, 충돌, 피해, 희생 등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지금의 사회를 감내하고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부터 정치적으로 후퇴하기 시작한다.

역사법칙은 추상적이고 필연적이지만, 그것은 구체적이고 우연적인 모습으로 실현된다. 추상과 필연으로서의 법칙엔 우여곡절들은 표현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구체적 현실을 추상화된 형태로 표현하는 이론에는, 일그러짐이나 전진과정에서의 심각한 퇴보 등이 실제보다 크게 축약되어 표현된다. 진보를 필연의 법칙으로 약속하는 이론에 이끌려 사회주의 혁명운동에 편입된 소부르주아들은, 구체적으로 펼쳐지는 사회관계와 역사현실에서 예상보다 크게 나타나는 우여곡절들 앞에서 당혹하고 좌절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로 왼쪽으로 전진하던 소부르주아들은, 이번에는 스탈린주의라는 일그러짐을 보며 도리질을 하며 외친다. ‘저건 아냐! 나는 사회주의를 바라지만, 저런 모습은 아니야. 나는 순수한 것을 원해!’

자연과학은 물이 1기압 아래에서 100℃에 끓는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추상적인 이론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는 정확하게 100℃에 끓는 물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만약 추상과 구체에 대한 진지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게 100℃에 끓는 물로만 라면을 끓여먹겠다!’고 누군가 끝내 고집한다면, 실제로는 라면을 먹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진심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차려야 한다.

사회주의 진영에 남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체제라는 압착기의 압박을 견뎌내어야 한다. 계급투쟁은 조합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현장에서가 아니라, 10월 혁명 이후에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탈한 노동자국가와 제국주의자 체제 내의 국경에서 가장 격렬히 전개되었다. 자국의 정부가 노동자국가와 대립할 때 노동계급은 당연히 자국 정부에 맞서 노동자국가를 지지해야 한다. 한편 부르주아지에게 노동자국가의 존재는 자신의 체제를 이데올로기적 물리적으로 늘 압박하는 문제였다. 그리하여 제국주의와 그 하수인이 통치하는 식민지국가들은 노동자국가에 대한 정치군사적, 이데올로기적 압박의 끈을 조임과 동시에 자국의 노동자들을 단속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과업이 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탈한 노동자국가에 대한 태도는 자본주의 국가 내에서 노동계급에게 심각한 탄압을 동반하는 예민한 문제였고,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은 그 압박에 못 이겨 이론적 타협을 하고 결국 사회주의 진영으로부터 이탈해 갔다. 그들은 노동자국가 혐오증이라는 자국정부와 매스미디어 사회적 인간관계 등 자본주의 사회의 압박으로 인한 굴복을, 스탈린혐오라는 정당한 태도의 일부인 양 가장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굴복을 감추려 했다.

알다시피 한반도 역사에서 북한에 대한 태도는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날카로운 문제이다. 모르긴 몰라도 30년대 말 섁트먼의 미국이나 토니 클리프의 50년대 영국에서보다 반공이데올로기는 그 극심한 정도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국가보안법으로 상징되는 이 압박은 남한 국가자본주의론의 굳건한 원천이다.

 

변증법이 아니라 형식논리로서의 국가자본주의론

마르크스주의는 ‘갑’은 ‘갑’이며 동시에 ‘갑’이 아니라는 변증법에 기초해 있지만, 국가자본주의론에 이끌리는 소부르주아들의 세계관은 ‘갑’은 ‘갑’일 뿐이라는 형식논리학이다.

“일반적 사고 즉 상식은 자본주의, 도덕, 자유 , 노동자국가 등과 같은 개념들을 고정된 추상적 개념으로 보면서 논리를 전개한다. 이 결과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와 같으며 도덕은 도덕과 같다는 식으로 가정한다. 반면에 변증법적 사고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을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분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들 속에서 “갑”은 더 이상 “갑”이 아니며 노동자국가는 더 이상 노동자국가가 되지 않는 결정적인 시점이나 한도를 결정한다.”–<맑시즘을 옹호하며> 중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쁘띠부르주아 소수파’, 트로츠키, 1939

형식논리학에 갇혀 있는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은 ‘소련 등의 국가는 사회주의가 아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소련 등의 노동자국가는 사회주의적이며, 사회주의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적인 것을 지키고,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것은 타도하자.’라는 변증법적 시각은 도통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는 척한다.

 

조합주의적 세계관과 국가자본주의론

국가자본주의론의 원천 중의 또 다른 하나는 조합주의이다.

<소련은 왜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가?>는 국가자본주의론이 인기를 끈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왜냐하면 [국가자본주의론은] 조합주의의 관점에 입각한 분석이기 때문이다. 영어권 나라들에서는 계급투쟁이 상대적으로 가라앉으면서 노동조합의 경제주의가 지배적 조류가 되었으며 자본가 계급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노동자국가에 대한 개념은 멀어 보이기만 한다. 이 상황 속에서 클리프나 섁트먼 등 제 3 진영 경향들의 이론은 노동운동권 내부에서 나름의 중요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국가 자본주의’ 이론의 반(反)맑스주의

소련 붕괴 이후 계급투쟁은 더욱 가라앉았다. 노동계급의 정치의식은 크게 후퇴했다. 혁명사상에서 후퇴하여 임금과 고용을 둘러싼 투쟁이 마치 노동운동의 주류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제주의가 남한 노동운동을 지배하게 되었다(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촛불정국과 사노련에 녹아 있는 것>을 볼 것). 임금과 고용에 주력하는 경제주의 노동운동에게는 “자본가 계급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노동자국가에 대한 개념은 멀어 보이기만”하고, 국가자본주의론은 남한에서도 골치 아프고 까다로운 문제를 저 멀리 밀어두는 그럴듯한 구실이 된다.

그리고 위 글은 계속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클리프와 섁트먼 이론의 진정한 정치적 내용은 이렇게 표현된다: 사회의 근본 갈등은 직접 생산자들과 이들의 소비욕구를 한편으로 하고 행정가들과 이들의 축적 욕구를 또 한편으로 하여 발생한다. 달리 표현하면 지금 더 많은 임금을 받으려 하는 노동자들의 욕구와 지금의 욕구 불만을 감내하고 미래에 투자하여 경제적 축적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행정가들의 욕구 사이의 갈등이다. 클리프와 섁트먼의 전망과 호소력의 원초적 근원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이놈들이 내 임금을 빼앗아 이것으로 공장을 짓는다. 이들이 누구이고 어떤 사회를 위해 일하든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놈들이 나를 더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계급 후진부위의 정치의식에 기반하는 노동자주의에게, ‘국가는 소유체제 방어를 위한 무력 집단’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명제는 ‘소유체제와 상관없이 개별 노동자가 얼마나 많이 얻을 수 있는가’의 문제로 치환되어 버린다. 사적소유 철폐와 그에 기초한 국가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노동계급 독재의 핵심 목표가 사회주의의 물질적 전제인 집단적 소유체제의 구축이라는 것을 주객전도하여 노동자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으면 집단적 소유체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3. 노동자권력과 사적소유 철폐 문제

소유형태와 국가권력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다. 국가권력은 특정 소유형태를 방어하는 무장 집단이다. 부르주아 독재 권력을 타도하고 수립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부르주아적 소유형태를 종식시키는 것이다. 사적소유의 철폐와 국유화는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독재를 행사해야하는 핵심이유이다. 사적소유의 철폐는 노동자 권력의 목표이며, 노동자 권력은 그것을 실현할 무기이다. 노동자권력과 소유형태의 관계,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의 핵심 임무, 그 사멸의 조건을 설명하기 위해, 레닌은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을 한 쪽 가까이 인용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권력을 잡고 나서는 먼저 생산수단을 국유화한다[레닌의 강조]. 또한 그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는 프롤레타리아트로서의 자신을 폐지하고 모든 계급차별과 계급 적대감을 폐지하며 또한 국가로서의 국가를 폐지한다.……마침내 국가가 진정 사회전체를 대표하게 될 때 국가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복종해야 할 그 어떠한 사회계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자마자, 그리고 현재와 같은 생산의 무정부성에 기초한 자신의 존립을 위한 개별적 투쟁과 이 투쟁에서 발생한 갈등 및 과잉생산 등이 계급통치와 함께 사라지게 되자마자, 복종을 위한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게 되며, 그 어떤 특수한 강제권력, 즉 국가는 필요가 없게 된다. 국가가 진정 사회전체를 대표하게 되고 사회전체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게 될 때, 제일 먼저 취하는 행동은 바로 국가로서의 최후의 독자적 활동으로 되어버릴 것이다.–<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 엥겔스, <국가와 혁명> p 28, 강조는 레닌

그리고 레닌이 이끈 러시아 10월 혁명은 바로 그러한 권력으로 역사 속에 등장하였다. 그런데 카우츠키 이래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은 10월 혁명으로 성립한 노동자국가의 민주주의 정도를 트집 잡으며, 그것을 이유로 사적 소유의 철폐와 국유화라는 10월 혁명으로 성립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핵심 성과를 거부해왔다.

카우츠키가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주장하는 주된 논거는 위에서 인용했다. 다음부터 살펴보는 것은 스탈린관료집단으로 인한 소련의 퇴보라는 다른 구실을 들고 나오긴 하지만, 내용상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배신자” 카우츠키와 한 치도 다름없는 논리를 펴는 그의 제자들이다.

사노신의 <북한경제의 자본주의적 성격>은 “한 사회의 성격을 정치적 억압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억압을 만들어낸 경제적 토대, 즉 생산관계로부터 찾아야 한다.”고 마르크스주의자연하며 시작한다. 그런데 그들은 곧이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을 위한 핵심조건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아니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는 이미 맑스가 『자본론』을 저술하던 시대에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판별하는 기준으로 적합하지 않게 된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을 위한 핵심조건”이 “생산수단의 사적소유가 아니”라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는 이미 맑스가 『자본론』을 저술하던 시대에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판별하는 기준으로 적합하지 않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충격적이다. “공산주의의 명백한 특질은 소유 일반의 폐기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의 폐지이다. 그런데 현대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는 계급적대에 기초한, 소수에 의한 다수의 착취에 기초한 생산물의 생산, 전유 체제의 최종적이고도 가장 완벽한 표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산주의자의 이론은 사적 소유의 폐지라는 단 하나의 문구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공산당 선언>)”는 언명은 마르크스의 것이 아니었나? 그들의 소부르주아적 세계관을 만족시키기 위해,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은 그 결론에 맞게 마르크스주의를 스스럼없이 수정한다.

길을 잃어 당황해하는 우리에게, 사노신은 자본주의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친절히 알려준다.

“다 시 한 번 더 강조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소유형태가 아니라 그 소유형태를 반영하고 있는 본질로서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노동과 대립되는 개별 상품생산자들의 고립된 사적노동이다.”

“소유형태가 아니라 그 소유형태를 반영하고 있는 본질로서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노동과 대립되는 개별 상품생산자들의 고립된 사적노동”이라? 도대체 이게 무슨 얘기인지 알 수가 없다.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은 이렇게 ‘마르크스주의’에 해박하다. 더욱 한숨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위 글의 부제가 “맑스주의적 분석”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클리프주의자임을 밝힌 대리운전노동자나 사노련도 같은 목소리로 말한다.

“1)노동자대표의 자유로운 투표에 의한 선출과 즉시 소환권, 2)노동자대표의 일반 노동자의 평균적인 보수유지, 3)민주적 민병대의 대치이다.…이러한 내용이 담보되지 않는 변혁은 사회주의 변혁(혁명), 즉 마르크스주의변혁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담보 유지되지 않은 변혁은 ‘노동자국가’가 아닌 것이다. 기형화된, 타락한 국가도 아니고, 질적으로 내용을 달리하는 국가인 것이다. 사회주의적 생산수단의 국가소유를 말할 때, 그 국가가 위와 같은 내용이 담보되지 않은 국가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대리운전노동자

“노동자 권력에 의한 국유화”만이 사회주의와 동의어가 될 수 있다. 뒤집어 말하자면 ‘노동자 권력’이 아닌 ‘다른 권력’에 의한 ‘국유화’, 즉 자본가 권력 혹은 비노동계급 권력 하의 국유화는 결코 사회주의가 아니다. 이름을 어떻게 붙이느냐는 그 다음의 일이다.”–3차 당건설운동 전국토론회 사노련 발제문

이들에겐 ‘민주적이지 않으면, 생산수단의 국유화도 아무 의미가 없다.’ ‘민주적이지 않으면, 노동자권력도 아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민주적이지 않은 권력이라면’ 그것이 기초하고 있는 국유화마저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고, “국유화는 형식적인 장치일 뿐(사노련)”이다. 그러므로 방어할 가치가 없다. 국유화 체제가 철폐되어 사적소유 체제로 환원된다 하더라도 즉, 자본주의 반혁명이 일어나더라도 괜찮다는 것이다. 실제로 1991-2년 소련 사태 당시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은 자본주의 복귀 세력을 그 ‘민주주의의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환호했다.

물론 노동자권력은 민주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노동자권력이 민주적이어야 하는 까닭은, 카우츠키나 섁트먼이나 클리프나 그 후배들 같은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의 권력에 대한 공포를 달래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노동자권력이 민주적이어야 하는 까닭은, 민주적이어야만 국유화에 기초한 노동자국가의 계획경제체제를 제대로 가동할 수 있기 때문이며, 더욱 중요하게는 오직 그래야만 내외부의 자본주의 복귀를 책동하는 세력들로부터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경제체제 즉, 국유화된 경제체제를 확고히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트로츠키가 그의 죽음 이후에 등장하는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의 논의까지 포함하여 충분히 반론을 펼친 바 있다. 다음 인용하는 <소련의 계급적 성격> 은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사적소유와 노동자권력’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전체를 인용하고 싶지만 일부를 길게 인용한다. 전문을 곱씹어 읽어주길 간곡히 바란다.

“노동계급 조직들의 자유가 질식되었고 관료집단은 전능하다. 이것이 현재 소련이 노동계급과 무관하다는 점을 지지하는, 가장 널리 퍼져있으며 인기를 누리는 그리고 처음 보기에 반박할 수 없을 것 같은 주장의 기초이다. 일인 독재를 가져온 관료기구의 독재체제를 노동계급 독재체제와 동일시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노동계급에 대한 독재체제에 의해 노동계급 독재체제가 대체되었다는 것은 명확하지 않은가?

그러나 언뜻 보기에 매력적인 이 주장은 현실에서 전개되고 있는 역사 과정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이 아니라 순수한 관념적 도식인 칸트의 규범에 기초해 있다. 혁명의 고상한 “친구들”은 노동계급 독재체제에 대한 대단히 휘황찬란한 개념을 스스로 개발했다. 그리고는 현실의 독재체제가 계급적 야만성의 유산, 내부 모순들, 지도부의 오류와 범죄행위 등을 모두 가진 채 자신들이 개발한 멋진 모습과 완전히 배치되자 정말이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가장 고상한 감성을 가진 이들은 실망하여 소련에 대해 등을 돌린다.

노동계급 독재체제에 대한 한 점 오류도 없는 설명은 어디에 그리고 어느 책에 나와 있는가? 계급의 독재라고 해서 이 계급의 대중 모두가 국가 운영에 언제나 참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점은 우선 소유계급들의 경우를 통해 이미 목격되었다. 중세의 지배계급인 귀족들은 왕정을 통해 사회를 지배했다. 이때 이들은 왕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자본가 계급의 독재는 이 계급이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었던 자본주의 상승기 때에만 민주적 형태를 비교적 발전시켰다. 우리가 보는 앞에서 독일의 히틀러는 파시즘이라는 독재를 통해 민주주의를 대체한 후 기존의 자본가 정당들을 전부 박살내어 버렸다. 현재 독일의 자본가 계급은 사회를 직접 지배하지 않는다. 이들은 히틀러와 그의 하수인들에게 정치적으로 완전히 굴복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가 계급의 독재는 독일에서 신성불가침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본가 계급이 사회를 지배하는데 필요한 모든 조건들은 보존되고 강화되어왔기 때문이다. 자본가 계급을 정치적으로 몰수하는 것을 통해 히틀러는 일시적으로나마 이들을 경제적 몰수로부터 구원해주었다. 독일 자본가 계급이 파시스트 정권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은 자본가 계급의 사회 지배가 위험에 처해 있으나 전혀 파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우리의 주장이 뒤이어질 것을 예상하고 우리의 반대자들은 서둘러 이렇게 반박한다: 사회의 소수에 불과한 착취계급인 자본가들은 파시스트 독재를 통해 자신의 사회 지배를 보존할 수는 있지만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는 노동계급은 스스로 정부를 운영하고 더욱 더 다수의 대중을 정부의 임무에 직접 끌어들여야 한다. 일반적 차원에서는 이 주장이 옳다. 그러나 소련이라는 구체적 현실에 이 일반적 주장을 적용할 경우 결론은 자명하다: 지금 소련의 독재체제는 질병이 걸린 체제이다. 제국주의에 의해 포위된 후진국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데 제기되는 엄청난 난관들은 지도부의 잘못된 정책들과 결합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지도부의 잘못된 정책들 역시 사회의 후진성과 제국주의에 의한 고립의 압력을 반영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관료집단은 10월 혁명을 통해 노동계급이 달성한 사회적 성과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지키기 위해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몰수했다. 사회의 성격은 사회의 경제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10월 혁명이 수립한 집단적 소유형태가 타도되지 않는 한 노동계급은 소련의 지배계급이다.

노동계급에 대한 관료집단의 독재”주장들은 좀 더 깊이 있는 분석이 없이 즉 관료 지배의 사회적 뿌리와 계급적 한계들을 명확히 설명하지 않은 채 제시되고 있다. 이 결과 이 주장들은 멘셰비키에게 그렇게도 인기 있는 과장된 민주적 수사들에 불과하다. 소련 노동자들의 압도적 다수는 관료집단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 중의 상당한 그러나 최악은 아닌 부위가 관료집단을 증오하고 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불만이 대규모 폭력을 동원한 저항으로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탄압 때문만이 아니다. 노동자들은 자기들이 관료집단을 타도할 경우 계급의 적들이 정권을 장악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소련을 비판하는 “민주주의자들”이 보기보다 관료집단과 노동계급 사이의 상호관계는 정말이지 훨씬 복잡하다. 다른 전망이 눈앞에 보이고 서구의 지평선이 파시즘의 갈색이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의 적색으로 타올랐다면 소련의 노동자들은 관료기구를 확실히 타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 상황이 일어나지 않은 한 노동계급은 입을 악 다문 채 관료집단을 “참아 넘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관료집단을 노동계급 독재의 담지자로 인정한다. 진심 어린 대화에서 소련 노동자 모두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강하게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 중 단 한 명도 반혁명이 일어났다고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노동계급은 소련의 근간이다. 그러나 통치 기능이 무책임한 관료집단의 손에 집중되어 있는 한 확실히 소련은 질병이 든 국가이다. 이 상황이 치유될 수 있을까? 이 질병을 치유하려는 더 이상의 노력들은 귀중한 시간을 쓸모없이 낭비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제기하면 안 된다. 치유하려는 노력은 세계혁명운동과 분리된 모든 종류의 인위적 조치들이 아니라 맑스주의 깃발 아래 더욱 힘차게 투쟁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중핵들을 훈련시키고 세계노동계급의 전위가 가진 투쟁 능력을 소생시키는 것, 바로 이것이 “치유”의 핵심이다. 이것은 역사 발전의 근본 방향과 일치한다.

지난 몇 년 간 우리의 반대자들은 몇 번이고 이렇게 말했다: 코민테른 치유에 몰두하는 것은 “헛되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코민테른을 치유하겠다고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약속한 적이 없다. 다만 결정적인 순간이 올 때까지 환자를 죽었다거나 전혀 가망이 없다고 선언하기를 거부했을 뿐 이다. 어쨌든 우리는 “치유 노력”에 단 하루도 낭비하지 않았다. 우리는 혁명 중핵들을 결집시켰다. 그리고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기본 이론과 강령을 마련했다. 이 두 임무는 똑같이 중요하다.”– <소련의 계급적 성격> , 트로츠키

 

4. 토니 클리프와 [소련국가자본주의]

카우츠키의 제자이자 남한 국가자본주의론의 비조, 토니 클리프의 <소련국가자본주의>를 읽고 난 소감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이 소부르주아적 공산주의 혐오증의 집결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혐오증은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로 포장되어 있다. 혁명전통은 그에 의해 쓰레기봉투로 쓰이고 있다.

그는 현실에서 등장한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증으로 술렁거리는 소부르주아들을 현란한 수치로 달래며 속삭인다. ‘당신이 가진 그 혐오증은 비겁 때문이 아니다. 정당한 과학이다.’ 한편, 진짜들의 비판을 피해가고 혼란시키기 위해 <국가 자본주의 이론: 나사가 빠진 엉터리 시계><소련은 왜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가?>의 5. “국가 자본주의” 이론의 반(反)맑스주의 에서 폭로된 것처럼 온갖 손재주를 동원한다. 핵심개념 뒤바꾸기, 얼렁뚱땅 넘어가기, 핵심 숨기기 등등.

 

반공주의적 결론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방식

<소련국가자본주의>의 1장은 갖가지 수치를 통해 다음과 같은 반공주의 결론들을 끌어내는 것이 목표이다.

“소련 공업에서 노동자의 노동생산성이 영국 노동자의 약 5분의 4인데 비해 생활수준은 영국노동자의 4분의 1 혹은 3분의 1이라면, 영국 노동자가 착취당할 때 그의 소련 형제는 훨씬 더 착취당하고 있다 는 것 외에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61쪽

“오늘날 영국 노동자에 비해 소련 노동자가 열악한 정도가 짜르 시대 영국 노동자에 비해 당시 러시아 노동자가 열악한 정도보다도 더 심하다 .”–61쪽

이처럼 클리프는 1917년 이전까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부르주아 혁명이 당면 과제인 것처럼 생각되었던 후진국 러시아, 내전과 기근, 제국주의자들의 포위 압박에 시달리고 있던 그래서 사회생산의 막대한 부분을 군사적 방어에 지출해야만 했던 러시아를 해가 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그 착취에 기초하여 당대 최강을 자랑하던 영국제국주의와 비교한다. 그리하여 자국 노동자들에게 노동자혁명 무용론을 암시한다. 이것이 클리프식의 ‘마르크스주의’이고 ‘과학’이다.

그가 마르크스주의자임을 자처하면서 그리고 위와 같은 심각한 결론을 끌어내면서 그 결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대체로 이런 식이다.

“1913년에 소련 공업의 평균 노동생산성은 미국의 평균 노동생산성의 약 25% 독일의 35% 그리고 영국의 40%였다. 1937년에 소련 공업의 노동생산성을 조사하도록 위임받은 고스플란의 한 위원회는 그것이 미국 공업 생산성의 40.5%이자 독일의 96%라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계산은 과장된 것이다. 실제로 1937년에 소련 공업의 노동생산성은 미국의 약 30%, 독일의 70%, 그리고 영국과는 대략 비슷한 수준일 것이라고 가정할 근거가 존재한다. 어떻게 우리가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는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너무 장황한 게 될 것이다. ”–59쪽

별별 잡다한 수치를 다 들이대며 현학을 과시하던 클리프였다. 그런데 정작 “영국 노동자가 착취당할 때 그의 소련 형제는 훨씬 더 착취당하고 있다.” 또는 “오늘날 영국 노동자에 비해 소련 노동자가 열악한 정도가 짜르 시대 영국 노동자에 비해 당시 러시아 노동자가 열악한 정도보다도 더 심하다.”와 같은 심각한 결론을 이끌어 내면서 드는 근거는 이런 식이다.  가정할 근거가 존재한다. 어떻게 우리가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는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너무 장황한 게 될 것이다. 

주장할 근거도 아니고, ‘가정할’ 근거를 가지고 노동자혁명 허무주의를 끌어낸다. 위와 같은 결정적인 결론을 끌어내면서 그는 말한다. “자세한 설명을 하는 것은 너무 장황한 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자를 과연,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는가?

나는 당시 소련의 생산성이 선진자본주의국가들의 수준에 비해 얼마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그러나 최소한 이렇게는 생각한다. 만약 클리프의 말처럼 혁명 후 20년 만에 후진국 러시아의 생산성이 영국제국주의와 “대략 비슷한 수준”에 도달했다면, 그것은 사회주의 혁명의 위대성을 찬양하는 근거로 쓰여야 하지 않을까?

클리프는 그런 대단한 “가정”의 근거를 영국노동계급이 아니라 영국부르주아지들에게 바치고 있다. 장황한 수치들로 그리고 결정적인 대목은 비약을 통해 그는 이렇게 외친다. ‘노동자 여러분! 러시아 노동자들은 여러분보다 훨씬 더 착취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본가 여러분, 걱정 마세요. 혁명 러시아가 자본주의 영국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제가 방금 노동자들에게 알렸습니다.’

생산성은 생산량과 다른 개념이다. 사적소유의 철폐로 인한 자본주의적 무정부성이라는 낭비 소멸, 부르주아 착취부분의 사회화, 중앙계획경제, 혁명의 열정 등으로 인해 노동자혁명은 경제 대부분의 영역을 혁명적으로 약진시킨다. 그러나 투여된 노동력 대 생산량의 비율로 표현되는 생산성은 그렇게 쉽게 개선되지 않는다. 그것은 생산성이 그 나라가 도달한 과학기술 수준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이고,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과학기술을 따라잡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것이 혁명 후 러시아 노동계급이 유럽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혁명을 간절하게 기대했던 이유 중 하나이다.

클리프가 비교하고 있는 당시는 아니지만, 요즘의 자료를 통해 그 당시 러시아와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생산성 격차를 간접적으로 추정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일본, 노동생산성의 국제비교, www.kiet.re.kr , 2008>에 따르면, 세계 7위를 차지하는 일본 제조업의 노동생산성 수준은 2005년 현재 86,608 달러이다. 러시아의 노동생산성은 22,767 달러로 51위, 브라질은 19,016 달러로 55위, 중국은 11,625 달러로 69위이다. 2005년 현재 러시아는 일본의 약 1/4(25%) 수준 이다.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이 비슷한 논리로 규정하는 중국은 1949년 혁명 이후 약 60년이 지난 지금, 일본의 약 1/8 수준 이다. 한편, <한중산업생산성격차와 변화추이, 한국산업연구원, 2008. 6. 5>에 따르면 “구매력평가(PPP) 기준 중국의 전 산업 생산성은 한국의 32% 수준, 중국 제조업 생산성, 한국의 60% 내외로 추정”된다. 이런 점에서 1937년의 러시아가 영국과 ‘생산성’의 측면에서 “대략 비슷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클리프의 “가정”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스탈린주의에 대해 가차 없던 클리프는, 이 대목에서만큼은 스탈린주의자들의 과장된 수치를 인용하면서 그와 비슷한 자신의 “가정의 근거”(설명하면 너무 장황한 것이 되므로 생략해야 하는)를 위해 스탈린주의 고스플란을 앞세운다. 이렇게 얄팍한 술수를 쓰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혁명 러시아 노동자가 자본주의 영국 노동자보다 더 착취당한다.’는 그의 논리를 성립시키기 위해서이다.

 

농업집단화에 대한 반동적 평가

마치 조갑제를 읽는 것 같은 이런 식의 반공주의적 궤변은 그 책 여기저기 널려 있다. 농업의 집단화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집단화는 공업에 들어온 사람들뿐 아니라, 또한 농업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프롤레타리아트로 전화시켰다. 농업 종사자의 압도적인 다수는 비록 이론에서는 아니더라도 현실에서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정말이지, 오늘날의 소련 농업 종사자들을 우리가 생산수단의 소유자라고 부를 명분은 19세기의 농노보다도 더 없는 것 같다. 결국 집단화는 공업 발전의 필요를 위한 농업 생산물의 해방, 자신의 생산수단으로부터 농민의 ‘해방’, 농민의 한 부분이 공업 노동력의 예비군으로 전화되는 것, 그리고 농민의 나머지가 부분 노동자, 부분 농민, 콜호즈의 부분 농노로 전화되는 것 등등의 결과를 가져왔다.”–65쪽

이 인용문에서 클리프가 말하는 “농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스탈린/부하린의 시장사회주의 정책으로 인해 점점 비대한 자본가로 변신해 가던 쿨락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작농? 아니면, 빈농이거나 농업 노동자? 클리프가 “19세기 농노보다” 못한 처지로 농업 노동자들을 전락시킨 것처럼 묘사하는 집단화를, 과연 누가 가장 거칠게 반대했을까? 클리프는 과연 ‘누구 입장에서’ 집단화를 냉소하는가?

물론 문제가 많은 집단화였다. 하지만 필연적 방향이었다. 스탈린관료집단이 아니라, 레닌이나 트로츠키가 이끄는 혁명적 볼셰비키였다 하더라도 집단화는 필연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주도한 집단화였다면, 위와 같은 비아냥거림을 클리프가 멈췄을까?

집단화는 토지를 중심으로 하는 농업생산수단에 대해 국가적 소유는 아니지만 집단적 소유 체제를 수립하여 사적소유를 폐지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당연히 콜호즈(소련집단농장)의 구성원들은 개인적(사적으로)으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농토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사회주의적 진보이다. 그런데 클리프는 소련 농업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의 ‘직접’ 소유자가 아니게 된(즉, 사적소유자가 아니게 된) 것을 안타까워한다. 사적소유가 아닌 집단적 소유 체제의 구성원들이 되었다는 이유로 19세기 농노보다도 못한 처지로 되었다고 비아냥거린다. 내친 김에 다음 문장에서는 아예 콜호즈 구성원들을 ‘농노’라고 부른다. 이 자가 마르크스주의자인가?

 

소부르주아적 역사허무주의

위에서 언급했던 그런 요인들로 인해 혁명 러시아 즉, 소련은 경제 대부분의 영역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그것에 대해 클리프는 다음과 같이 그 성과를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동원하며 비꼰다.

“인민의 노력과 자기희생은 관료의 부실경영과 낭비에도 불구하고 소련을 공업 강대국의 지위로, 공업 생산량에서 볼 때 유럽에서 제4위, 세계에서 제5위의 서열로부터 유럽에서 제1위, 세계에서 제2위의 서열로 끌어올렸다. 소련은 잠자던 그 후진성으로부터 성큼 걸어 나와 현대적인 강력한 공업 선진국이 되었다. 그리하여, 관료층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부르주아지에게 바친 그만큼의 많은 찬사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업적을 위해 바쳐진 대가는 물론 평가하기 불가능한 규모의 인간 수난이었다 . –97쪽

대자본가의 압박에 질식한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자의 대변인 클리프의 이 평가는, 얼마나 반공주의에 찌든 패배주의인가?

그렇다 클리프여! 러시아 혁명은 대규모의 “인간 수난과 인민의 노력, 자기희생”의 기반 위에서 성공했고 진행되었다. 그리고 지도부가 건강했다면, 그 수난과 노력과 자기희생 중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크게 줄여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혁명은 트로츠키의 말처럼 “역사에 대한 외과수술”이다. 숨넘어가는 사회를 살려내기 위한 역사의 불가피한 선택이며,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희생과 노력과 수난은 불가피한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그런 식으로 교착을 극복하고 발전을 이루어내었다. 장기적 병적상태와 더 막대한 수난과 희생으로부터 인류를 구해내었다. 당신이 러시아혁명과 이 이후의 역사적 우여곡절을 비아냥거리며 말하는 “평가하기 불가능한 규모의 인간 수난”은 과연 무엇 때문인가? 혁명으로 인한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의 야만성으로 인한 것인가?

같은 사실에 대한 트로츠키의 평가와 비교해보면서, 클리프가 지닌 허무주의적 세계관이 노동계급의 혁명적 낙관주의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진 것인지 가늠해 보기로 하자.

“1913년 돈(Don) 지역의 석탄생산량은 277만 5천 톤이었는데 1935년에는 712만 5천 톤에 이르렀다. 지난 3년 동안 철강 생산은 2배로 증가하였고 강철과 압연은 거의 2.5배가 증가하였다. 석유, 석탄, 철강의 생산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과 비교하여 3배에서 3.5배 증가했다. 전기 공급에 대한 계획이 처음 입안된 1920년 당시 러시아 전역에는 10개의 지역발전소가 있었으며 총생산량은 27만 3천 킬로와트였다. 그런데 1935년에는 95개로 발전소의 수가 증가하였고 전기의 총생산량은 435만 5천 킬로와트에 달했다. 1925년 소련은 전기 생산량에서 세계 11위였다. 그러나 1935년에는 독일과 미국 다음으로 최대생산국이 되었다. 석탄생산의 경우에는 10위에서 4위로, 강철생산에 있어서는 6위에서 3위로 도약했다. 그리고 트랙터와 설탕 생산에서는 세계 제1위가 되었다. 공업에서의 엄청난 성취, 처음부터 아주 밝은 전망을 보여준 농업, 구 공업도시들의 비범한 성장과 새로운 도시들의 건설, 노동자 수의 급격한 증가, 문화적 수준의 향상과 문화적 수요의 증대 등은모두 의심할 여지없이 10월 혁명의 결과였다. 구시대의 예언자들이 인류 문명의 종말을 알리는 징조라고 애써 주장했던 혁명이 이 성과를 올린 것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과는 논쟁할 필요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승리했음을 증명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가 아니라 지구 표면의 6분의 1을 차지하는 공업지역에서 이것이 증명된 것이다. 그리고 유물론의 언어가 아니라 강철, 시멘트, 전기라는 언어로 승리를 표현하였다. 비록 체제 내부의 어려움,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공세, 지도부의 실책 등으로 소련이 붕괴한다고 할지라도 (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우리는 진심으로 희망한다) 미래에 대한 전조(前兆)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만은 파괴되지 않고 남을 것이다: 오직 노동계급 혁명 덕분에 어느 후진국이 10년 내에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업적을 달성했다 . ”–<배반당한 혁명>, 1936

대략 이와 같은 것이 역사에 대한 노동계급의 평가이다.

 

클리프의 ‘자본주의’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이 자신들의 궤변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마르크스주의를 어떻게 수정 왜곡하는지는 앞에서 사노신 등의 예를 통해 알아본 바 있다. 클리프도 이에 지지 않는다.

“자본의 집적이 한 자본가나 자본가들의 집합 또는 국가가 국민총자본을 자기 수중에 집적하는 단계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세계시장에서 경쟁이 지속되는 한그와 같은 경제도 여전히 자본주의 경제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는 아무도 없었다. ”–151쪽

그는 여기서 “국가가 국민총자본을 자기 수중에 집적하는 단계” 즉, 사적소유가 전면적으로 철폐된 경제 체제(그것을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이행기라고 지칭하는데)라 하더라도 “세계시장에서 경쟁이 지속되는 한” 자본주의 경제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물론 사노신처럼 자신의 국가자본주의론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이고 그를 위해 사회성격 규정의 핵심인 소유형태를 외면해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그 경쟁과 사적소유 그리고 사회성격에 대해 레닌은 이렇게 말한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단계에 이르러 생산의 전면적인 사회화에 바짝 접근한다.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자본가들을 그들의 의지나 의식에 반하여 어떤 새로운 사회질서, 곧 완전한 자유경쟁으로부터 완전한 사회화로의 과도적인 질서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생산은 사회화되지만, 소유는 여전히 사적이다. 즉 사회적 생산수단은 여전히 소수의 사적 소유로 남아있다. 형식적으로 인정된 자유경쟁의 일반적 틀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소수의 독점체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씌우는 멍에는 한층 무거워지고 가혹해지고 견디기 힘든 것이 된다.”–<제국주의론>, 레닌, 백산서당, 53쪽

즉, 클리프는 “세계시장에서 경쟁이 지속되는 한” 자본주의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레닌은 경쟁이 축소되고 “생산[생산수단이 아니라]이 전면적인 사회화에 바짝 접근”하더라도, “사회적 생산수단이 여전히 소수의 사적 소유로 남아있”게 되는 경우, 그것은 자본주의인 것이다. 사회성격의 본질은 ‘생산수단의 소유형태’이지 경쟁(클리프)이니 사적노동(사노신)이니 하는 것들이 아닌 것이다. 클리프는 자꾸 “사적소유의 철폐라는 공산주의 이론의 핵심(<공산당선언>)”을 저런 되도 않는 궤변으로 비껴가려고 한다.

게다가 그 궤변을 “의심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는 아무도 없었다.”라고 말한다. 그의 얼굴은 얼마나 두툼한가.

 

계급론의 왜곡

클리프는 영악하다. 결코 자기가 앞장서지 않는다. 자신의 수정주의이론 그대로 돌격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나 엥겔스, 레닌 또는 트로츠키를 앞세우고, 그 뒤를 따른다. 자신의 궤변이 마치 그들의 연속선 위에 있는 것처럼.

자신의 수정주의적 계급론을 주장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레닌을 앞세운다.

“우리는 그들이 역사적으로 확립된 일정한 사회적 생산 체계에서 점하는 위치, 생산수단에 대한 그들의 관계, 사회적 노동체계에서 그들의 역할, 그리고 따라서 그들이 처분할 수 있는 물질적 부의 부분을 획득하는 방법과 그 부분의 크기 등에 의해 구분되는 인간의 큰 집단을 계급이라고 부른다.”–161쪽

하지만 뒤에서는 이렇게 슬쩍 바꿔치기한다.

“스탈린주의 관료를 카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옳지 않다.계급은 생산 과정에서 특정한 위치를 갖고 있는 인간 집단 인 반면, 카스트는 법률적·정치적 집단이다.”–162쪽

계급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와 그 형태가 핵심이 된다. 그리하여 레닌의 정의에도 “생산수단에 대한 그들의 관계” “그들이 처분할 수 있는 물질적 부” 등의 언급이 있는 것이다. 특히 소유 여부는 그 소유물에 대한 ‘자의적 처분(사용, 폐기, 양도, 상속, 매매 등)’의 가능 여부에 달려 있고, 레닌의 정의엔 바로 그 점이 지적되어 있다. 그런데 클리프는 “생산 과정에서 특정한 위치를 갖고 있는 ”이라는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바꿔친다. 물론 소련을 ‘자본주의’로 그리고 관료집단을 자본가 ‘계급’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의 소유문제는 마르크스주의 계급 규정의 핵심이다. 레닌은 <국가에 대하여>에서,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현안인 국가 문제의 혁명적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인류역사에 등장한 계급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노예소유주와 노예는 계급들로의 최초의 거대한 분화입니다. 첫 번째 집단은 모든 생산수단들을 소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집단은 사람들까지도 소유하였던 것입니다. 이 집단은 노예소유주라 불렸고 일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노동을 제공했던 사람들은 노예라 불렸던 것입니다.……이 형태를 뒤이어 역사에서 다른 형태 즉, 농노제가 뒤따라왔습니다.……사회의 기본적인 분화는 농노소유주-지주와 농노입니다.……노예소유주들은 노예들을 자신들의 소유로 여겼으며 법은 이런 견해를 강화하였고 노예소유주의 소유에 전적으로 처해있는 물건으로써 노예들을 간주하였습니다. 농노에 대해서는 계급적 억압, 예속이 남아있었지만 그러나 농노소유주 즉, 지주는 물건들로써 농민의 소유주로 여겨지지 않았고 단지 농민의 노동권 그리고 일정한 부역 마치는 것에로의 농민의 강제에 대한 권리만을 가졌을 뿐입니다.……자본의 소유자들, 토지의 소유자들, 공장의 소유자들은 모든 인민노동을 전적으로 관리하고 그리고 그러니까 그 대다수가 생산과정에서 자신들의 노동하는 손들, 노동력의 판매로부터만 생존수단들을 얻는 프롤레타리아들, 임금노동자들인 근로대중 전체를 자신들의 명령, 억압, 착취 하에 틀어쥐고 있는 극소수 주민을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대표하였고 대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레닌의 규정과 달리, 소유 문제를 고의적으로 빠뜨리는 클리프의 계급 정의는 얼마나 얼빠진 허깨비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리프에겐 소련이 국가자본주의이어야 하므로, 관료집단은 계급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후에도 궤변을 이어간다.

“우리는 실제로 국가를 ‘소유’하고 있고, 축적 과정을 통제하고 있는 소련관료를가장 순수한 형태의 자본의 인격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164쪽

클리프를 통해 생산수단을 사적소유한 자가 아니라, 소련관료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자본의 인격화[자본가]”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가 계급임을 말하기 위해선 생산수단의 소유여부를 증명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선 생산수단의 자의적 처분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소련의 객관적이고 명백한 현실은 그것을 증명할 기회를 그에게 주지 않는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소련 관료집단은 ‘연줄’을 상속하므로 자본가 계급이라는 또 하나의 애처로운 발견을 이루어 낸다.

“생산수단의 집적소로 되어 있는 국가에서 국가관료-지배계급-는, 봉건영주나 부르주아지 또는 자유 전문직종과 다른 특권상속 형태 를 갖고 있다. 만약 기업의 경영자, 정부 부서의 우두머리 등등을 뽑는 지배적인 방식이 호선(互選)이라면, 모든 관료는 그의 자식에게 백만 루블을 상속하기보다는(물론 이것도 중요하지만), 그의 ‘연줄(connection)’을 물려주려고 애쓸 것 이다. 동시에 그는 대중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 같은 것을 제한하여 관료 자리를 둘러싼 경쟁자 수를 제한하려고 명백히 노력할 것이다.”–168쪽

어린아이 떼쓰기여서 상대할 가치도 없지만, 천번만번 양보해 보자. 그래, 연줄을 상속하므로 계급이라고, 연줄을 상속하는 사회이므로 자본주의 사회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상속할 수 있는 것이 연줄일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관료적 연줄을 끊는 일인가? 아니면 연줄을 상속하는 사회를 철폐하기 위해, ‘먼저’ 생산수단을 상속하는 사회로 복귀하는 일인가?

 

개념 바꿔치기와 소부르주아적 감성에 호소하기

클리프의 야바위 기술은 현란하다. 권위자 앞세우기, 정의 바꿔치기, 등등과 더불어 이번에는 개념도 바꿔친다. 국가자본주의론을 내세워야 하는 그에게, 목에 걸린 가시 같은 <배반당한 혁명>에서 “토지의 국유화 그리고 산업 생산수단·운송수단·교환수단의 국유화는 대외무역에 대한 독점권과 함께 소련 사회구조의 기초를 이룬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확립된 이들 관계를 통하여 소련의 성격은 우리들에게 기본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국가로 정의된다.”는 구절을 인용한 후, 클리프는 다음과 같이 투덜거리며 은근슬쩍 개념을 바꿔치고 소부르주아적 감성에 호소한다.

“[만약 이 정의가 옳은 것이라면] “혁명에서 노동자 계급이 취하는 첫 번째 조치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것이다”라는 말도 틀린 이야기가 된다.…국가가 생산수단의 소유자인데도 노동자들이 그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고 있다는 즉, 노동자들이 지배계급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275쪽

 노동자들이 그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할 때의 ‘노동자들 ’은 개별개념 즉, 현실 속에 존재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체적인 노동자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고 있다”라고 말할 때의 ‘노동자들 ’은 노동계급 전체를 반영하는 집합개념이다. 서로 다른 개념이다.

그런데 표현은 같지만 내포는 다른 두 개념을 마치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을 끌어내고 싶기 때문이다. 즉,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을 소유한 국가가 노동자국가이다. 노동자들이 통제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을 소유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소련은 노동자국가가 아니다.’ 마치 ‘사람은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다. 그런데 영철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영철이는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다.’식이다.

부르주아 국가라고 해서 모든 개별 부르주아가 국가의 통치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 박정희나 전두환 시절처럼 부르주아 국가권력이 개별 부르주아 위에 군림하고 심지어 재벌을 해체시키는 ‘주제넘은’ 만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것은 부르주아 국가이다. 클리프의 개념 바꿔치기 수법으로 노동자국가 부정하기에 대한 반박은 이미 위에 인용한 트로츠키의 <소련의 계급적 성격>에 잘 나와 있다.

다음은 클리프가 트로츠키의 과학적 설명과 객관적 현실 앞에 짜증을 내며 소부르주아적 감성에 호소하는 부분이다.

“사회혁명인가 정치혁명인가?: 관료와 노동자가, 내무인민위원회의 간수와 그 죄수가 같은 계급에 속한다는 말인가? 생산 과정에서 그들의 위치가 그렇게 적대적인데, 생산수단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동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날카롭게 충돌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만약 노동자와 관료가 같은 계급에 속한다는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 소련에서는 한 계급 내의 투쟁은 존재하지만 계급들 간의 투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즉, 계급투쟁이 없다고 결론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소련에는 계급투쟁이 없다는 스탈린의 주장을 트로츠키가 공격하는 마당에 이 무슨 어불성설 이란 말인가?”–286-286쪽

노련한 야바위꾼 클리프는 이 대목에서 마치 자기는 세상에 대해 잘 모른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고 ‘짐짓’ 흥분한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날카롭게 충돌하는” 노동자와 조합관료들을 무수히 보아 왔다. 그들은 하나의 계급이다. 다 알고 있으면서 호들갑 떨 일이 아니다. 소련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체제 즉, 국가소유에 기초해 있지만 부르주아적 분배규범이 여전한 사회였다. 그리고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혁명으로 보완되지 않은 고립된 혁명이었다. 그런 점에서 부르주아적 요소가 잔존해 있었고 그것은 결국 부정적인 방향으로 양적 축적을 거치다가 결국 1991-2년의 자본주의 반혁명을 낳았다. “스탈린의 주장을 트로츠키가 공격하면서” 왜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느냐고?

 

트로츠키라는 가시 삼키기

트로츠키라는 목엣가시를 삼키지 못하고 애쓰던 클리프는 예의 현란한 손기술을 동원해 급기야 트로츠키를 자기편으로 만들고 만다.

“트로츠키의 마지막 저서: …트로츠키와 같이 뛰어난 분석력을 가진 사람조차도 스탈린주의 체제에 대한 자신의 기본적 분석을 때때로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물론 강조점에서만 그렇다는 이야기지만 , 타락한 노동자국가론의 수락이 좌익반대파의 가입조건이었던 때부터 제4인터내셔널에서 반방어주의자들을 배제하자는 제안을 더 이상 고집하지 않게 될–비록 그들의 입장을 그가 인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때 사이에, 트로츠키의 입장에는 엄청난 변화 가 있었던 것이다. ……트로츠키가 소련관료를 지배계급으로 새롭게 평가하는 방향으로 분명히 나아갔던 것은 그의 마지막 저서 <스탈린>에서였다.”–285쪽

권위 있는 혁명가 트로츠키가 죽을 때까지 자신과 정반대의 결론을 주장했다는 것은 클리프에게 치명적이다. 그래서 상상한다. ‘만약 트로츠키가 마지막 순간에 그의 소련방어노선을 폐기했더라면.’ 그리고는 위와 같은 교묘한 말장난을 거쳐 결국 트로츠키를 자기편으로 만든다. 트로츠키가 “자신의 기본적 분석을 때때로 재검토”했다는 것이며, “[소련]방어주의 반대자들을 배제하자는 제안을 더 이상 고집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명백한 사실을 무지막지하게 부정하는 것은 ‘너무’ 뻔뻔하다는 것을 클리프 역시 알므로, 그는 그 뒤에 “물론 강조점에서만 그렇다는 이야기지만”, “비록 그들의 입장을 그가 인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같은 애처로운 단서들을 붙인다.

노련한 야바위꾼 클리프는 자신의 견해를 믿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 즉, 거추장스런 소련방어노선을 폐기하고 싶지만 그 배신을 가려줄 어떠한 이론적 근거라도 얻고 싶은 사람들과 대화하는 방법 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가정으로 시작하다가 뒤에서는 단정하는 식의 비약적 논법을 쓰는 것에 익숙하다. 그렇게 해도 자신들의 배신을 가려줄 그 무엇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은 선뜻 그 논리적 비약마저 눈감아줄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위에서 트로츠키가 ‘자신의 견해를 재검토했을지도 모른다.’는 분위기만 풍기다가, 몇 문장 아래에서는 급기야 “트로츠키가 소련관료를 지배계급으로 새롭게 평가하는 방향으로 분명히 나아갔”다고 단정한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그것이 트로츠키의 마지막(!) 저서였다는 것이다. 브라보!

클리프씨, 진작에 그렇게 이야기할 것이지. 그랬다면 굳이 당신이 그 책 전체를 통해 트로츠키의 노선을 갖은 노력을 들여가며 비판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냥, ‘소련방어노선은 트로츠키의 견해가 아니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전향했다!’라고만 말했더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더불어 클리프씨에게 한 가지 조언을 드린다. 그 ‘위대한 발견’(<소련국가자본주의, 부록I: 소련을 “타락한 노동자국가”로 본 트로츠키의 정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 8번째 장에서의)으로 그 논문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았다. ‘무엇이 트로츠키로 하여금 소련이 노동자국가라는 이론을 포기하지 못하게 했는가’라는 그 논문의 마지막 장은 “트로츠키가 소련관료를 지배계급으로 새롭게 평가하는 방향으로 분명히 나아갔던 것은 그의 마지막 저서 <스탈린>에서였다.”는 당신의 ‘위대한 발견’을 스스로 반박하고 있다.

참고로, 트로츠키는 1940년 8월 21일 스탈린의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리고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의 소련방어노선 폐기를 주장하는 섁트먼 버넘 등의 소부르주아 분파에 맞선 그의 이론적 투쟁은 그의 사후 <맑시즘을 옹호하며>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 책에 실린 트로츠키의 마지막 글은 1940년 8월 17일 작성된 것이다.

 

클리프식 정답 고르기

장기야바위는 몇 개의 장기짝을 가지고 손님이 상대(야바위꾼)의 항복을 받아내면 건 돈의 몇 배를 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야바위 문제 중 하나는 상대방 왕의 뒷자리로 자신의 기물을 이동시키는 외길수순으로 이기는 것인데, 야바위꾼은 그 자리를 장기통으로 슬쩍 가려놓는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못하는 그리고 가려져 있기 때문에 그 자리로 기물을 옮길 것에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손님은 백전백패한다.

우리의 재주꾼 클리프씨는 ‘이론 분야에서’ 그러한 수법을 응용한다. 아래 같은 식이다.

“트로츠키가 소련을 과도기 사회로 규정했을 때, 소련 자체가 그 자신의 내재적 법칙에 의해 사회주의의 승리로 나아가거나 아니면 사적 자본주의로 복귀할 것이 틀림없다는 그의 강조는 올바른 것이었다. 후자의 경우가 제외된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나가 남게 된다. 1. 스탈린주의적 입장 2. 관료적 집산주의 이론 3. 국가자본주의……[위의 둘을] 거부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세 번째 대안일 뿐이다.”–288-289쪽

제4인터내셔널의 입장 즉, 트로츠키의 분석은 소련사회에 대해 유일하게 옳은 분석이다. 그런데 클리프는 그 정답을 “제외”하고 남은 ‘오답’들인 자기 입장과 허접한 두 개의 다른 입장을 ‘손님’들에게 선택지로 제시한다. 그리고 나머지 둘을 소거한 후, ‘정답’이라며 뽑아든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국가자본주의라는 대안일 뿐이다!’ 그리고 ‘손님’들은 클리프 앞에서 기꺼이 백전백패한다.

 

어쭙잖은 정신분석

갖은 시도를 다해보지만 과학적 분석을 통해 트로츠키의 입장을 반박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클리프도 안다. 자신의 것이 과학이 아니라, 소부르주아적 정치태도일 뿐이고, 그것을 과학인 양 덧칠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상대방 입장의 과학성을 그 자체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의 처지를 이용하여 그 주장의 과학성을 문제 삼는 방식(논리학에서 ‘정황에 호소하는 오류’라고 말하는)을 동원한다.

“무엇이 트로츠키로 하여금 소련이 노동자국가라는 이론을 포기하지 못하게 했는가?: 트로츠키에게 과거의 경험은, 반동의 승리가 항상 애초의 출발점으로의 복귀로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주된 장애물이었다.”–292-293쪽

클리프는 이제 정신분석을 동원한다. 트로츠키가 소련을 노동자국가로 규정하는 이론 그리고 그 이론적 귀결로서 소련방어노선을 “포기하지 못하게” 된 것은 그가 가진 “과거의 경험”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어쭙잖은 정신분석학을 동원하여 과학을 때려눕히려 노력했던 원조는 클리프가 아니었다.

다음은 클리프가 한사코 거리를 두려고 애를 썼던 브루노 알이라는 또 다른 소련방어노선 폐기론자의 진단이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에 가담한 바 있다. 그래서 소련을 노동자국가가 아니라고 생각하기가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소련이 노동자국가가 아니라면 자신이 일생을 바친 대의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쩜 그리 똑같은지. 살아생전의 브루노 알과 그리고 사후의 클리프 같은 사이비들 모두에 대해 트로츠키는 이미 이렇게 호통 친 바 있다.

“대단히 명민한 정신분석학의 시조 프로이트라면 이런 식의 말을 늘어놓는 사이비 정신분석가들에게 귓방망이를 날렸을 것이다. 내 자신은 이런 폭력을 행사할 천성이 결코 없다. 그러나 나를 이런 식으로 비판하는 사이비 정신분석가들은 대단히 주관적이며 감상적인 인물들임 을 독자 여러분들에게 감히 확신시키고자 한다.”– <맑시즘을 옹호하며> 중 ‘소련의 사회성격에 대하여 다시 또 다시’

이들이 왜 “대단히 주관적이며 감상적인 인물들”인지에 대한 트로츠키의 논증은 위의 인용 다음에 이어진다. 그 부분을 꼭 읽어보시길 바란다.

 

5. 이 시대의 ‘국가와 혁명’과 노동계급의 과제:

기형적 노동자국가 중국과 북한을 제국주의 침탈과 자본주의 반혁명으로부터 방어하자!

우리는 지금까지 카우츠키 섁트먼 클리프 사노련과 사노신 등 (퇴보하거나 기형적인) 노동자국가 방어노선 폐기론은 소부르주아의 동요와 자본주의 정치압박으로 인한 굴복의 이론적 합리화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 원칙으로부터 이탈하고 그 지점에서부터 그 원칙을 수정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논증했다. 그리고 저마다 서로 다른 ‘이론’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핵심에서 모두 똑같은 음조로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으며, 그리하여 세계와 남한의 노동계급을 패배의 길로 오도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논의의 핵심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국가소유형태(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이행기 사회의 지배적 소유 형태)를 방어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은 (퇴보하거나 기형적인) 노동자국가 방어노선을 제기하면 마치 그 주장이 그 나라들을 사회주의라고 인정하는 것인 양 스탈린 관료집단을 지지하는 것인 양 과장하며 논점을 호도한다. 그러면서 스탈린 관료집단만이 아니라 체제의 타도를 주장하며 자본주의 반혁명의 진영으로 나아간다.

둘은 (퇴보하거나 기형적인) 노동자국가 현재의 국가형태를 용인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소련 그리고 지금 중국에서 보듯이, 현재의 모순을 해결해낼 능력이 없으며 혁명을 그 기반부터 무너뜨리고 있다. 이들은 노동계급의 정치혁명을 통해 타도되어야 한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이런 논의를 제기하면 그 주장이 마치 국유화 체제라는 혁명의 성과 모두를 타도하자는 주장인 것처럼 논점을 왜곡한다.

불행하게도 다함께, 사노련, 사노신 그리고 해방연대 등은 노동자국가방어노선을 폐기했다. 그들은 서로의 차이점을 주장하지만, 그 강령의 유사성으로 인해 중국, 북한 등에서 노동자 정치혁명 세력과 자본주의 반혁명 세력이 충돌하는 결정적인 순간 한 목소리를 낼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에 대하여 반대하며 부르주아 평화주의 입장을 취하는 것처럼.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그들은 미제국주의와 남한자본가의 편을 들고 있다.

1991-2년 소련에는 자본주의 반혁명이 있었다. 지난 1991-2의 퇴보한 노동자국가 러시아의 붕괴는 제4인터내셔널의 분석과 예견이 올발랐음을 부정적 형태로 입증했다. 퇴보한 노동자국가 러시아와 동유럽의 기형적 노동자국가들에서 자본주의 반혁명이 일어났다. 반혁명은 1917년 혁명의 성과를 집어 삼켰다. 빈곤, 실업, 기아, 차별, 타락, 매춘, 조직폭력, 마약, 자살 등등은 자본주의 판도라 상자에서 다시 튀어나와 인민을 도탄에 빠트리고 사회를 자본주의 생지옥으로 변화시켰다. <러시아: 자본주의 생지옥>은 반혁명 이후의 러시아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유엔개발프로그램]의 1999년 연구보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1990년대 이전에 중동부 유럽 그리고 구 소련(지금의 독립국가연합) 국가들은 높은 수준의 기본적 사회보장을 인민에게 제공하여 주목을 받았다…. 완전 평생 고용이 보장되었다. 현금 수입은 적었지만 안정적이고 변동이 없었다. 수많은 기본 소비재와 서비스는 국가 보조금을 받아 공급이 규칙적으로 유지되었다. 의식주 문제는 안정적으로 해결되었다. 교육과 의료는 무상으로 보장되었다. 퇴직자들에게 연금이 보장되었고 많은 종류의 사회보장 프로그램으로 이들은 정기적인 혜택을 누렸다.”

프릴랜드에 의해 “카지노 자본주의의 최대 승리자”로 묘사된 “족벌” 미하일 프리드먼은 1991년 이후 인민의 삶이 질적인 변화를 겪었음을 확실히 인정했다. 심지어 그는 구 소련 시절에 대한 향수를 토로했다:

“예전에 나의 생활은 소련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자유분방했다…. 물론 물질적으로 보면 사람들은 그리 잘 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걱정거리가 없었다. 진짜 치열한 관심거리는 친구, 정신적 관심사, 책 등이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지금보다 훨씬 더 열려있었다. 우리는 경쟁에 시달리지 않았다. 지금 존재하는 불평등과 시기심은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 요즘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 <프릴랜드, 앞의 책>

자본주의하에서 인민은 생활하기가 더 힘들며 수명도 더 짧아진다. 1991년과 1995년 사이에 러시아 남성의 평균수명은 63세에서 58세로 급격히 떨어졌다. 인구증가율은 1990년의 2.4%에서 1996년의 마이너스 5.4%로 떨어졌다. (이 수치는 다른 나라로 이주한 수백만 명의 숙련 청년노동자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공공의료 체제는 거의 붕괴하였다. 현재 국내총생산의 1%가 공공의료 예산으로 책정되어 있는데 이 수치는 가장 가난한 신식민지 국가들에서나 볼 수 있다. 이 결과 결핵을 비롯해 과거에 근절되었던 전염병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지금 다시 나타나는 질병들은 표준 예방주사로 통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소아마비는 현재 서방 선진국에서는 거의 드문 병이 되었는데 다시 나타나고 있다….” — <[유엔개발프로그램]>

1989년과 1995년 사이에 에이즈 발생 건수는 급증했으며 매독 발생률은 40배나 증가했다:

계획경제의 파괴로 수백만 근로인민은 자신과 가족을 먹여 살릴 능력을 박탈당했다. 이 결과 마약 남용에서 배우자 폭행에 이르는 모든 종류의 사회 병리현상이 증가했다. 1991년에서 1995년까지 자살 건수는 거의 두 배로 늘었으며 타살의 비율도 급등했다:

“반실업 상태의 청년들은 생활 광고 난에 `높은 보수만 주면 어떤 위험도 감수한다’는 암호 표현을 사용하여 살인청부 광고를 냈다. 피라미 범죄자들은 사소한 이익을 위해 살해를 자행했다: 부동산 사기꾼들은 아파트를 상속받기 위해 잘 속아넘어가는 연금생활자들을 살해했다; 어느 범죄 조직은 자동차 보수공장을 위장하여 자동차 주인들을 죽이고 시체를 토막내었다.” — <프릴랜드, 앞의 책>

러시아의 사회 반혁명은 장애인, 연금생활자, 아동, 여성 등 사회의 약자들에게 특히 가혹했다. 유엔개발프로그램의 보고서 작성자들은 이념적 편향을 드러낸 채 놀라움을 표명했다:

“좀더 민주적인 자본주의 복귀는 역설적이게 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여성들은 과거에 비해 공직에서 더 밀려나고 있다. 동시에 이들의 임금고용 기회가 줄어들었으며 가정과 직장 내에서 이들이 처리할 일의 비중은 전체적으로 늘어났다….여성 폭력은 배우자의 폭행과 함께 증가했으며 … 범죄에 희생되는 여성의 숫자도 증가했다. 직장과 더 좋은 생활을 필사적으로 원하는 여성들은 폭력배 조직에 의해 매춘을 강요당했다.”

프릴런드는 여기서 수치스러운 조사 결과를 인용하고 있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나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교에 해당되는 러시아의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여학생들에게 최고로 선택되는 직업은 “달러 매춘”이었다.

자본주의 복귀는 제 2차 세계대전보다 더 많은 고아를 발생시켰다. 2001년 6월 1일자 [비비씨(BBC) 뉴스]는 이렇게 보도했다:

“2백 5십만 이상의 아동이 거리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양육할 능력이 없는 부모에 의해 버려졌다. 러시아 보건부의 보고서에 의하면 러시아 아동의 거의 전부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시기에 한 두 가지의 고질병을 앓고 있으며 다수는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 17세의 나이가 되면 10명 가운데 1명만이 건강한 것으로 평가된다.”

[유엔개발프로그램] 보고서는 자본주의 복귀의 결과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러시아 인민은 꽤 좋은 교육, 건강한 생활, 적절한 영양 등을 더 이상 안정적으로 누릴 수 없다. 증가하는 사망률, 곧 닥칠 새롭고 파괴적인 유행병 등으로 생존 자체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구 소련과 동구 국가들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실제로는 대공황의 완곡한 표현일 뿐이다. 생산의 붕괴와 치솟는 인플레는 사상 유례가 없다. 인간의 안정적 삶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보수적인 수치에 의하면 1억이 넘는 인민이 빈곤으로 추락했으며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인민은 불안하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뿐이다.”

자유시장 몽상가들의 장밋빛 전망과는 정반대로 러시아의 급조된 부르주아 계급은 시설 개선, 효율적 생산 방식의 도입, 생산 확대 등에 대해 놀랄 정도로 무관심하다:

“새 러시아에서 번영하는 자들은 초대형 부자들뿐이다…. 이들의 막대한 부는 새로운 기술, 좀더 효율적인 서비스, 좀더 생산성 있는 공장에서 나오지 않았다. 붕괴한 국가소유 즉 유전, 니켈 광산, 텔레비전 방송 채널, 수출 면허장, 심지어는 국가의 은행 계좌 등에서 나왔다. 그리고 일단 러시아의 매판자본가들이 전리품을 확보하자 이들은 이것을 가능한 빨리 더 안전한 해외로 도피시켰다. 1991년과 1999년 사이에 1천억 달러에서 1천5백억 달러의 자본이 러시아를 빠져나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산했다. 러시아는 왜곡된 시장경제를 탄생시켰다. 10년간 지속된 경제불황, 죽어가면서 더욱 빈곤에 허덕이는 하층 계급, 호화로운 생활에 찌들어 있는 극소수 기생 계층 등으로 러시아는 일종의 자본주의 생지옥이 되었다. 구 소련의 선전가들이 `썩어 들어가는 서구 부르주아 사회’라고 불렀던 끔찍한 삶의 이미지가 러시아에서 현실로 등장했다. — <프릴런드, 앞의 책>

1917년 10월 혁명은 세계적 사건이었고 그리하여 그 붕괴 역시 세계적인 파장을 불러왔다. 세계의 자본과 노동의 정치 군사 이념적 역관계는 자본에 유리한 쪽으로 현격히 변화되었다. 사회주의 노동운동권은 위축되었고, 많은 인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각 사업장의 경제투쟁은 방어적인 투쟁에만 급급했다. 승리의 믿음이 꺾이고 절망감이 엄습했다. 체제 내적 개량주의 운동이 대세가 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인민들의 생활여건이 얼마나 처참하게 추락했고, 세계 그리고 남한 노동계급의 정치적 후퇴가 얼마나 심각했으며, 자본가 계급과의 역관계가 얼마나 불리해졌는지 사노련 다함께 사노신 등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자본주의 복귀 이후 나타난 재앙적인 사태 전개를 그저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국가자본주의론자들에게 소련 중국 북한 등의 스탈린주의 노동자국가는 “무너져도 빨리 무너져야 할 반동적 체제”이거나 “타도되어야 할 체제”이다. 그 논리로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은 자본주의 복귀를 이끌었던 옐친 집단을 환호했다. 그들에 따르면 1991-2년에 별일 없었다 . “게걸음처럼 한 형태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또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 체제로 옆 걸음을 쳤(토니 클리프)”을 뿐이거나, ‘소연방이 와해되고, 국영기업들이 사유화되고, 소련 집권 당 관료는 사적 자본가들로 변신하고,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벌어져 노동자들은 더 고통 받았다. 하지만 그랬을 뿐, 자본주의 반혁명은 없었다(사노련회원).’

지금 중국은 위태하다. 중국이 자본주의 반혁명으로 인해 붕괴하고 그에 이어 북한이 붕괴한다면 그 사건은 세계와 남한노동계급에 1991-2년 소련 붕괴 그 이상의 충격파를 몰고 올 것이다. 지금 기형적 노동자국가 중국은 날카로운 갈림길 위에 있다.

“퇴역 장성과 전직 장관들이 포함된 17인의 중국공산당 원로그룹은 ‘개혁’과 동반된 저임금, 국영부문의 축소 그리고 외국자본 침투를 비판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그 서한의 작성자들은 친자본주의적 행로를 수정하고 마오쩌둥 사상으로 돌아올 것 즉, 재국유화와 중앙계획으로 돌아올 것을, 다가오는 17차 당 총회에 호소했다. 만약 시장개혁이 계속된다면 “옐친과 같은 인자가 나타날 것이고, 당과 나라는 곧 비극적으로 파괴될 것이다.”라고 그들은 경고했다. 마오주의 반대파들의 제안은 통과되지 않았다 .“– 중국은 어디로?: 정치혁명과 반혁명의 갈림길

중국공산당으로 대표되는 중국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집산화된 소유형태를 지키려는 분파와 국가자산의 전면적 사유화를 추진하려는 분파로 예리하게 나뉘고 있다. “옐친과 같은 인자가 나타날 것이고, 당과 나라는 곧 비극적으로 파괴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그룹이 있는가 하면, 그것에 맞서는 파벌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그 동안의 시장경제 추진으로 인해 체제 내부의 자본주의 복귀 세력의 영향력은 그 어느 때보다 증대되었고, 그들은 미국, 일본 등 제국주의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업고 있다.

국유화 체제와 이해를 같이하는 노동자 농민과 중국공산당 내 보수파를 한편으로, 전면적인 사유화로 나아가고자 하는 중국공산당 내 시장주의자, 국내 기업가, 외국의 중국인 자본가 그리고 세계 제국주의 세력을 한편으로 하는 균열이 점점 더 첨예해지고 있다. 그 승부는 어느 쪽이건 “소유체제를 방어하는 폭력기구” 즉,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자의 승리로 결정될 것이다. 중국 내에 국가권력을 둘러싼 결정적 대결이 임박해 있다. 이 결정적인 대결의 시기, 중국 노동계급이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가 사태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남한 노동계급이 어떠한 입장을 취할 것인가 역시 그 사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중국노동계급에게 남한 노동계급이 혁명적 영감을 줄 것인가, 아니면 국가자본주의론의 최면에 빠져 반혁명을 지지할 것인가. 이것이 이 시대의 ‘국가와 혁명’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한 분석과 정치적 입장은 IBT가 최근 발표한 중국은 어디로?: 정치혁명과 반혁명의 갈림길로 대신한다.

“결정적 대결의 시기, 보수파는 필연적으로, 오직 간접적인 방식으로, 인민대중의 지지에 의존하도록 강제될 것이다. 반면 친자본주의 집단은 국내 기업가들과 외국의 많은 수의 중국인 부르주아지들 그리고 세계 제국주의에 의해 지지받게 될 것이다.

중국에 자본주의는 이미 복구되었다고 주장하는 자칭 ‘혁명가들’은 중국공산당의 분열을 단지 부르주아지 진영 내부의 분열로 볼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의 논리는 그 문제에 대해 중립을 취하려 하거나, 또는 더 가능성 높게, 소위 ‘민주적인’ 반혁명을 지지하려 할 것이다. <노동자인터내셔널위원회(CWI)>, <노동자권력(Workers Power)>, <통합서기국(United Secretariat)> 그리고 그 밖의 겉치레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이 1991년 8월에, 야나예프의 ‘비상위원회’로 대표되었던 스탈린주의 잔존자들에 대항한 보리스 옐친 무리들을 지지했던 것처럼.

중국 스탈린주의 보수파와 자본주의 복구파들과의 결전에서, 1991년 소련 사태에서 우리가 그러했던 것처럼(<1917> 11호의 “루비콘강을 건넌 소련과 좌익의 반응”을 보시오), 트로츠키주의자는 후자에 맞서 전자를 지지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트로츠키가 이행강령에서 주창했던 입장과 일치하는 유일한 노선이다.

“이러한 정치적 전망 속에서 ‘소련 방어’의 문제가 더욱 구체적인 시급성을 띠고 있다. 만약 내일 소위 ‘부텐코 분파’라고 명명되는 부르주아-파시스트 분파가 정치권력을 넘볼 경우 ‘라이스 분파’는 불가피하게 바리케이드의 반대편에 서서 이들의 기도에 저항할 것이다. 일시적으로 스탈린의 동맹자가 되더라도 결국 이 분파는 보나파르트 파벌이 아니라 소련의 사회적 기초 즉 자본가로부터 빼앗아 국가소유로 변모시킨 소유체제를 방어할 것이다. ‘부텐코 분파’가 히틀러와 동맹하고 있는 사실이 증명된다면 이 ‘라이스 분파’는 소련 국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파시스트들의 군사적 개입에 대항하여 소련을 방어할 것이다. 이와 다른 정치행동은 세계혁명에 대한 배신행위이다.

“소련에 대한 자본주의 반혁명 세력의 공공연한 공격에 대항하여 관료집단의 테르미도르 분파와 제 4 인터내셔널이 ‘공동전선’을 수립할 가능성을 미리 엄격하게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소련에서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는 아직까지도 이 테르미도르 관료집단을 타도하는 것이다. 이 집단의 지배기간이 하루씩 연장될수록 경제의 사회주의적 요소는 파괴되고 자본주의 반혁명의 성공 가능성은 증대된다.”

중국공산당 보수파는 본질적으로 중국 기형적 노동자국가의 근본모순 즉, 집산화된 생산수단과 타락하고 무능력한 보나파르트주의 관료의 정치독점 유지 사이의 모순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 ‘급진적’ 자본주의 복구세력과의 대결에서 스탈린주의 보수파의 승리가 노동계급의 손에 정치권력을 즉각 쥐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혁명가들에게, 중국공산당으로부터 정치권력을 빼앗을 정치혁명의 전망 속에서, 중국 노동계급의 가장 선진적인 부위를 획득할 기회를 그 엄중한 때에 제공할 것이다. 반면에 중국의 옐친이 승리하게 된다면, 그것은 중국과 세계 노동계급에게 치명적인 역사적 패배가 될 것이고 미래의 투쟁에 심각히 어려운 정치지형을 만들게 될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소련과 지금의 중국 상황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들이 있다. 한편으로, 중국의 사적 부문은 대략 1억의 산업노동자를 양산하면서 동시에 갓 태어나기 시작한 1991년의 러시아 자본가들보다 강력하고 응집력 있는 자본가 계층을 키워왔다. 사유 기업은 중국 GDP의 50%를 차지하며 몇몇 도시에서는 70%의 고용을 담당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 노동자들은 소련 노동자들보다 자유시장의 착취에 대하여 훨씬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 대량의 실업자를 낳고 있는 현재의 세계 경제위기는 중국의 프롤레타리아와 그들의 동맹자인 빈농들 사이에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을 부채질하고 있다.

중국 노동자들은 유약하고 깊이 균열된 중국공산당 관료집단을 전복하는 데에 필요한 투쟁정신과 사회적 힘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노동계급 정치혁명은 진정한 노동자민주주의에 기초한 중앙계획경제 기구와 국내외 자본의 몰수를 통하여 평등한 사회주의 미래를 향한 길을 열어낼 것이다. 성공적인 봉기엔 국제적이고 트로츠키주의 강령으로 무장한 사회주의 혁명정당이 이끄는 수백만의 분출이 필요하다. 그와 같은 정당은 사유화된 착취현장 노동자들이 당면하고 있는 과제들과 관련된 강령을 제출할 것이고, 그 투쟁을 국영기업 노동자들의 사유화와 해고 반대 투쟁과 결합시킬 것이다. 혁명가들은 또한 농민과 지방의 협동농장 구성원들, 소수민족, 여성 그리고 그 밖의 피억압자들의 특수한 문제들도 자신의 문제로 떠안을 것이다.

중국 프롤레타리아 정치혁명의 승리는 세계의 역사적 사건이 될 것이다. 그것은 그 즉시 세계 정치지형을 통째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그것은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에서부터 남한과 일본, 그리고 멀리는 북미와 유럽 제국주의 요새의 혁명적 분출을 점화할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첫 걸음은 1949년 사회혁명의 성과를 무조건적으로 방어하는 중국 트로츠키주의의 핵을 결집하는 것이고, 제4인터내셔널 재건을 위한 중국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다.

 

2009년 6월

행동강령